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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Dec 07. 2019

과학자가 논하는 인류 불평등의 역사

『총·균·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 문학사상 (1998)


우리의 지식 체계는 커다란 공백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윤리적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뉴기니인인 작가의 친구 얄리는 궁금했다. “왜 우리 흑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총·균·쇠』는 얄리의 질문에 답하기 위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연구와 집필 결과다. 무려 25년이 걸린 대업이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작가 본인에게 대단한 명예를 안겨주었으니. 출간 다음 해인 1998년 퓰리처상을, 『제3의 침팬지』에 이어 두 번째로 영국의 과학출판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디 개인적인 명예에 그칠 일이랴. 『총·균·쇠』는 얄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인류 역사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켰다. 



인종(DNA) 아닌 환경의 문제


얄리의 질문을 곰곰 들여다보자. 그는 자신들이 백인들처럼 문명화 될 수 없었던(화물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그 질문의 본질은 문명과 원시를 가른 핵심이 무엇인가이다. 문명의 차이는 각 대륙에 불평등한 역사를 부여했으며 그것은 정복과 굴복이라는 숙명을 낳았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했던 역사가 대표적인 논거다. 유럽인은 있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없었던 무기와 병균(면역력), 금속(기술). 그 3가지는 수백 배가 넘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을 굴복시킨 직접적 원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문자와 정치체계의 유무도 정복의 힘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은 어떻게 문자와 기술을 갖고 정치체계를 확립했으며, 무시무시한 병균과 무기까지 얻을 수 있었던 걸까? 그것은 신탁도, 유전적 우월함도 아닌 환경에 기인한다고 작가는 피력한다. 그 환경이란 식량생산을 할 수 있는 즉, 작물과 가축이 잘 자랄 수 있는 지역을 뜻한다. 그 주장에 대한 장황하도록 구체적인 증명이 바로 『총·균·쇠』인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결국 유럽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대단히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인종차별 따위는 집어치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증명을 압축해보면 이렇다. 작물화와 가축화라는 식량생산은 인구증가와 자가 촉매작용을 하며 중앙집권이라는 정치체계를 이룬다. 잉여식량이 정치인, 기술자 등 전문가를 양산하며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갖는데 불을 지폈고 때문에 문자와 법률이 필요해졌다. 더욱이 다양한 발명으로 (일부 지역의) 인류는 눈부시게 문명을 발전시켰다. 


또한 가축을 키우면서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동력을, 전쟁에서 유리한 탈 것을, 그리고 의도치 않게 병균의 면역력까지 얻음으로써 지배하는 문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 수혜자 중의 수혜자가 바로 유럽들이다. 그들은 식량생산에 최적화된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는 축복받은 환경에서 출발할 수 있었던 유리함을 손에 쥐고 결국 아메리카 대륙 정복이라는 역사를 써냈다. (작가는 중국 문화의 확산이나 아프리카 대륙의 인종 획일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럼 이제 얄리의 물음에 간단히 답해보자. “자 이제 알았습니까 얄리? 당신들이 문명을 누릴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식량생산이 원활하지 못한 척박한 땅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과학자가 증명하는 인류사 


이 책을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 하나 있다. 역사에 대한 신선한 해석도 해석이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이력과 역량에 압도됐다. 생리학 박사인 그는 이 책을 통해 고고학, 유전학, 생물학, 지리학, 생태학, 병리학, 언어학 등을 총망라한다. 이러한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데 작가는 그것이 오직 한 사람의 작업이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단 700 쪽 분량으로 인류사를 정리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잠깐, 답을 하기 전에 어릴 적에 즐겨봤던 <우주보안관 장고>라는 만화를 떠올려본다. 주인공 장고는 신비의 캐륨 광선을 차지하려는 악의 무리에 맞서 뉴텍사스를 지키려고 사투를 벌인다. 그는 샤머니즘을 빌어 곰과 매, 늑대의 힘을 가진 초능력을 얻게 되는데 그와 그의 스승은 인디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인디언을 처음 접한 것이 <우주보안관 장고>였고 흥미롭게 봤던 만큼 인디언에 대한 막연한 호감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중학교 때 <라스트 모히칸>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인디언 학살의 역사를 대단히 구체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백인들에 대한 분노가 가시지 않아 며칠 동안이나 꿈에서 시달리기도 했던 잊을 수 없는 영화였다. 처음으로 영화음악 테이프를 사서 들으며 영화와 역사를 마음속에 꼭 저장했던 나는 그 이후 줄곧 원주민, 흑인 노예 등 한 번도 만나본 적 없고 만나볼 일 없는 약자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다소 구구절절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이런 결론을 얻기 위함이다. 나는 왜 작가와 같이 인류의 불평등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작가처럼 그 원인을 파헤쳐볼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분노와 정의감에만 불타 있었던 것일까? 작가가 『총·균·쇠』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증명처럼 그것은 나와 작가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작가가 혼자서 13,000년을 관통하는 불평등의 인류사를 어떻게 고증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본인도 인정했지만 그는 언어학자인 어머니와 소아과 의사인 아버지 덕분에 다양한 학문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한 환경은 작가의 폭넓은 호기심과 시너지 효과를 내며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역사서 탄생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렇게 『총·균·쇠』의 특별함은 방대한 지식의 터널을 거치면서도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지 않는데 있다. 작가는 인류 불평등에 대한 해답을 과학적 증명으로 채우고 있는데 기존의 역사서가 설명을 했다면 『총·균·쇠』는 설득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데 이 책에는 유독 ‘만약에’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 ‘만약에’는 논거를 확실히 하기 위한 장치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20세기 눈부신 과학의 발전이 『총·균·쇠』와 같은 걸작을 낳은 밑거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늘 과학을 역사의 하위 카테고리로 접했던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과학이 역사를 이끌어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읽게 될 줄은 몰랐던, 지적 허영의 끝판왕(?)으로 군림하는 『총·균·쇠』에 대한 개인적 감상으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나에게 『총·균·쇠』는 예습, 복습을 철저히 시키는 깐깐하지만 약간의 유머를 갖춘 선생님의 수업 같았다. 예습 복습이 철저하다는 것은 중언부언으로 인해 자칫 지루함을 유발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작가의 큰 그림이 아닐는지. 이렇다 할 배경지식 없이도 꿋꿋이 이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잘 짜인 교양 강좌를 듣게 된 기분이 드니 말이다. 『총·균·쇠』는 무엇보다 (서양)우월주의에 빠지지 않은 역사라는 점, 아시아를 자세히 바라보려 노력하며 분량을 균등하게 분배하려 했던 점,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언급과 김소월의 시가 실려 있던 점 등으로 보너스 점수를 두둑이 챙겨주고 싶은 인상 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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