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유발 하라리 | 김영사
신기술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세계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람들은 훨씬 더 오래 일할 것이고,
90세에도 자기계발을 해야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더 유명해진 츠츠이 야스타카의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1990년)는 현재를 살아가는 소녀와 미래에서 온 소년이 만난 이야기다. 소년은 미래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 소녀에게 말한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꼭 기다릴게.....” 이 책을 접한 이후 미래 세계를 상상할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대다수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의 암울한 미래보다 그런 낭만이 차라리 낫지 싶었기 때문이다. 소년이 사는 2660년은 인구증가로 달과 화성에 식민지가 생겼고 상류계급, 과학자, 교수 등은 지구에 남아 행성을 구할 방법을 찾고 있다. 비극적 미래가 심어놓은 고정관념 탓인지 몰라도 가장 먼저 떠났을 것 같은 상류층과 지식인들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니... 그것조차 지나친 낭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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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우리의 미래를 제대로 살펴보고 싶다면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가 제격일 것 이다. 작가는 인류 역사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줬던 전작 『사피엔스』의 마지막에서 짧게 미래를 예고한 바 있다. 그 본편이 바로 『호모 데우스』다. 전작보다 농익은 유머와 위트에 깔깔거리다가도 사뭇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에서는 참담함마저 느껴졌다.
『호모 데우스』는 지난 20세기가 공상과학 같은 미래의 포문을 열기 전, 인류의 비약적 발전을 정리한다. 몇 백 년 동안 골머리를 앓았던 생물학적 빈곤선(기아)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함대(역병)를 격파하고, 정글의 법칙(전쟁)을 깬 위대한 인류! 건강하고, 풍족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에 관심과 창의력을 쏟을 것인가? 생명공학과 정보기술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막대한 힘을 생각하면 이 질문은 더더욱 시급하다.(P.16) 역사에는 공백이 없고 성공은 야망을 낳으니, 인류에겐 새로운 의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죽지 않고 행복하게 신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호모 데우스』가 정치적 선언도, 역사에 대한 예언도 아닌 미래를 바꿔보자는 제안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책의 수많은 ‘만약에’와 ‘물음표’는 막막한 미로가 아닌 새로운 이정표가 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을까? 진화론(과학)은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고,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실험실의 우울한 쥐가 인간의 항우울제 개발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동물도 인간과 같은 감응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역설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의식을 방패 삼아 동물과 선을 그었고, 결정적으로 상상력을 앞세워 동물을 식료품과 실험도구로 전락시켰다. 자의식의 근거란 동물에게는 객관적 실제(울타리)와 주관적 실제뿐(나)이지만 인간은 상상력을 동원해 돈, 종교, 국가와 같은 상호주관적 실제를 가지게 된 더 우월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피엔스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상호주관적 의미망을 엮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P.213)
정복을 마친 호모 사피엔스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다. 과학이 시기에 따라 바꾼 짝꿍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초기 과학은 유신론적 종교를 등에 업었고. 이후 자본주의, 다음은 인본주의가 종교를 대신했다. 그 중 현재까지 영향력을 행하사고 있는 것은 인본주의다. 신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니, 11세기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이라면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21세기 세계 평화의 상징인 프란체스코 교황은 인본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윤리학에서 인본주의의 모토는 ‘좋게 느껴지면 해라’이다. 정치학에서 인본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고 가르친다. 미학에서 인본주의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있다’고 말한다.(P.319) 개인의 자유의지를 중요시하는 인본주의는 각각 자유주의(정통파)와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진화론적 인본주의(나치즘)로 분열되어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자유주의가 승리했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는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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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로 발전한 알고리즘은 오히려 자유주의 패키지를 위협한다. 전투력 향상 헬멧은 욕망도 조작 가능함을 증명했고, EMI는 바흐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 놀랍도록 바흐다운 작곡을 한다. 구글은 검색어를 통해 보건당국보다 빠르게 독감 동향을 파악할 수 있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개인비서 프로그램 ‘코타나’는 조만간 인간을 따돌리고 코타나들끼리 소통할 것 같다. 알고리즘이 인간을 직업시장에서 몰아내면 전능한 알고리즘을 소유한 소수 엘리트 집단의 손에 부와 권력이 집중될 것이고, 전례 없는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할 것이다. 아니면 그 알고리즘들이 스스로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P.442)
알고리즘의 위력과 우려를 모두 대변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배우 안젤리나 졸리다. 그녀는 유전자 검사로 유방암 확률 87%의 BRCA1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유방 절제 수술을 공표했다. 따지고 보면 알고리즘이 그녀로 하여금 수술을 결심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녀는 많은 여성들이 유방암에서 해방될 수 있길 바라며 기꺼이 사생활과 자율을 희생했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3,000불에 달하는 유전자 검사를 받을 수 있을까? 안젤리나 졸리는 엘리트 집단에 속했기에 유방암을 피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렇듯 인류에 영생과 신성을 동시에 안겨줄 핵심 기술인 의학은 혁명의 바람을 타고 20세기 평등주의에서 21세기 엘리트주의로 이동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인본주의를 대신할지 모를 데이터교는 아예 사피엔스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전자 알고리즘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우리에게 선택권이 남아 있을까?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이 기차를 놓치게 된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좌석을 얻기 위해 당신은 21세기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의 힘은 증기와 전신기계의 힘보다 훨씬 더 강하고, 이것들은 그저 식품, 섬유, 자동차, 무기를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의 주력 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디킨스의 영국과 마딘의 수단 사이의 격차보다 더 클 것이다. 실은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간의 격차보다 클 것이다. 21세기 진보의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는 신성을 획득하는 반면, 뒤처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할 것이다.(P.378)
등골 오싹한 이야기다. 책 곳곳에 이러한 경고와 같은 염려가 실려 있다. 진짜 미래에서 기다리는 것은 역시 디스토피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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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 계급의 폭력적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자본론』을 읽고 자본주의를 수정했으며, 마르크스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본주의는 승승장구했다. 유발 하라리는 이것을 지식의 역설이라 명했다. 어쩌면 『호모 데우스』는 의도적인 지식의 역설을 위한 책이 아닐까? 경악과 비참을 동반한 미래에 대해 공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고, 그 예측을 보기 좋게 피해가라는.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P.103)이라는 문장에 붉은 밑줄을 긋고 마음에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