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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Feb 22. 2021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 | 문예출판사


그토록 강하고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이 
그렇게 사악하고 비열하단 말인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책과 캐릭터를 알기만 했던 30년. 그동안 나는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머리와 목에 철심과 못이 박혀 있는 초록색 존재가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알고 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더욱 의아했던 것은 그 기괴한 존재는 그저 ‘괴물‘일 뿐,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 마지막까지 나는 그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프랑켄슈타인』은 과물을 ‘만든 자‘의 이름이다. 그는 대학에서 과학(화학)을 공부하던 중, 종족번식과는 다른 방식을 통해 생명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피조물의 탄생에 대한 기쁨도 잠시. 프랑켄슈타인은 세상에 막 나온 그 존재의 끔찍한 모습에 기겁을 하고 현장을 방치한 채 달아난다. 이는 유망한 과학자가 될 뻔했던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간다. 호기심이 부른 실수든 뭐든 간에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생물을 창조했다는 것, 그리고 그 뒷감당을 회피한 것, 두 가지 모두 책임론의 근거가 된 것이다.


괴물은 온통 자신을 거부하는 세상에 홀로 내던져졌다. 불의 사용부터 비바람을 피하는 법, 언어습득까지 독학해 독하게 살아남았다. 지각이 깨어날수록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고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절절이 깨달아가던 괴물은 외로웠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 섞여 들기에 2.4미터나 되는 키는 그렇다 쳐도 혐오스러운 얼굴과 피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자신을 만든 창조자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나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것 같다.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 것이지! 이게 뭐람.” 괴물은 상심과 고민 끝에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필사의 제안한다. 하지만 오만한 창조자는 끝내 괴물의 제안을 거부하고 끝끝내 비극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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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00년 전에 쓰인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 과학소설이라는 장르를 열었다는 점, 신의 영역을 넘본 과학에 대해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는 점, 괴물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 등은 『프랑켄슈타인』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의미로 짚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유독 마음이 쓰이는 부분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는 괴물의 존재 자체였다. 그래서 앞서 이름에 대해 언급한 이유를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지어준다. 단지 부르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이름은 아닐 것이다. 이름은 존재를 부여하는 통과의례다. 하다못해 물건에도 이름을 붙이면 특별한 존재가 된다. 애착 인형에 이름을 지어 부르거나, 자동차에 이름을 짓는 이들도 있다. 학창시절 나는 일기장에 이름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또한 우리가 관계를 맺을 때 선행되는 것이 바로 통성명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내어준다는 것은 마음의 빗장을 하나 열었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에게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면 어땠을까.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어떻게든 그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해봤다면... 그런 악몽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괴기소설이 아니라 성장소설 혹은 인권소설이 됐었겠지. (『프랑켄슈타인』은 바이런을 주축으로 문인 몇몇이 괴기소설을 써보자는 일환에서 탄생한 책이다.) 물론 그런 방향 역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괴물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면 거기에 수많은 대입이 가능하다. 여성, 아동은 물론이고 난민, 장애인, 성소수자, 유기견 등등. 만일 그들이 우리가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아는 존재’라면, 그들이 그저 약자이자 소수자에 불과할까? 


괴물은 흉측한 모습이었지만 갓난아기처럼 순결한 상태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그의 창조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오직 장님만이 괴물과 편견 없이 대화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을 보면 ‘보이는 것’은 오히려 내면을 보지 못하도록 마음의 눈을 가릴 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멀쩡한 외모에 나름 지성인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나쁘다. 그의 가장 큰 잘못은 괴물을 품으려 하지 않은 것, 그에게 이름 하나 지어주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꾸 이름 이야기를 하니 이쯤에서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바로 그 시, 김춘수의 「꽃」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괴물은 분명 꽃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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