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좀 뻔하고 뻔뻔한 핑계를 늘어놓을 참이다. 책과 별로 친하지도 않았지만 특히 내가 고전과 접점이 없었던 구차한 이유들을 말이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계속해서 독자들이 찾는 책. 우리는 그걸 고전이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고전을 접하는 계기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소개, 좋아하는 사람의 추천 혹은 다양한 상황에서의 인용 덕분인 경우가 많다. 아니면 고전전집이 거실 책장에 전시라도 되어 있었든지. 학창시절 고전이 너무 재밌다고 일부러 찾아보는 친구를 본적 없었던 빈약한 경험이 만든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 집에는 고전전집은 고사하고 그 흔한(?) 『햄릿』, 『장발장』, 『톰 소여의 모험』 등의 어린이용 책도 없었다.
부모님은 우리 남매의 독서에 크게 압박을 하신 적이 없다. 내가 아버지께 물려받은 취미나 취향은 아버지 방의 물건들에서 비롯됐다. 주로 카메라, 문방사우, 등산용품 등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카메라와 필기구를 좋아하고, 바다보다는 산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정도로 남았달까.
반면 엄마는 독서를 즐기는 편이었다. 장르는 주로 대하소설. 특히 『토지』, 『혼불』, 『여명의 눈동자』 등은 내가 심부름으로 사다 날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결혼 전에는 무협지도 한 보자기씩 싸서 빌려다 보셨다고. 하지만 나는 대하소설이든 무협지든 제목 뒤에 숫자가 적힌 게 싫었다. 이야기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중학교 때 친구가 빌려준 『죄와 벌』은 내가 처음 본 고전의 실물이었다. 그마저도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읽었지만 어떤 감동이나 교훈, 심지어 인상적인 문장도 건진 게 없었다. 오히려 주인공에게 좀 짜증이 났다. 자수할까 말까...를 가지고 책 두 권 분량 동안 고민만 하다니. 게다가 등장인물의 이름은 또 왜 그렇게 긴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주인공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로쟈’라는 애칭만 기억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의 첫 고전의 별점은 선심 좀 써서 하나?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의 대문호인지 알게 뭐람. 재미가 없는데.
자, 이제부턴 고전의 ‘재미’를 이야기해 볼 참이다. 흔히 고전은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잘 모르기 때문이다.
20대 초반까지 『데미안』, 『성채』, 『호밀밭의 파수꾼』, 『이방인』 정도를 읽었는데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표면적인 서사 말고는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게 없는 것 같다. 『성채』는 의학의 역사와 이슈에 완전히 무지했고, 『호밀밭의 파수꾼』은 미국 상류층 학교나 1950년대 미국의 이해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최근에 읽은 『오만과 편견』만 해도 그렇다. 요즘은 물론이고 30년 전 10대들도 마찬가지. 결혼에 대한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잖은가. 옛날 얘기라고 읽는다 손치더라도 (10대의) 나라면 다섯 딸을 좋은 집안에 결혼시키려고 발버둥치는 엄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니 청소년 필독서에서 다수의 고전을 빼야 한다는 최근의 일부 여론에 크게 공감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고전작품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결혼이라는 전환점을 지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물리적인 청춘의 절반 이상을 보낸 30대 후반이다. 다시 마주한 『호밀밭의 파수꾼』, 『이방인』은 전혀 새롭게 읽혔고, 『위대한 개츠비』, 『좁은 문』은 시대적 괴리에도 느껴지는 참신함이 있었다. 『이반일리치의 죽음』, 『페스트』, 『소송』은 시공간을 뛰어 넘는 서사와 필력에 혀를 내두르고 무릎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도 내 삶이 지나온 다양한 흔적과 유의미한 진폭이 고전의 마중물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고전이 흥미롭게 다가온 결정적 이유 한 가지는 고전으로 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바로 문학사다.
2년 전, 순천시립도서관에서 마련한 세계문학 강의를 신청했다. 이미 두 학기를 진행한 강좌였는데 수강생들의 앙코르 덕분에 서너 학기를 연장하게 되면서 간신히 행운을 누렸다. 강사는 『책에 빠져 죽지 않기』,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등을 저술한 이현우 작가. 그의 전공인 러시아 문학부터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남미까지 문학으로 세계일주를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1회에 다섯 시간짜리 강의가 복잡하고 방대해 어질어질했다. 시대적, 역사적 배경의 큰 강부터 작가 개인사로 연결되는 실개천까지 엮어낸 지도를 더듬더듬 볼 수 있게 된 것은 최소 3강 이상부터였다.
곧 멀미는 잊히고 소설을 읽을 때마나 기적을 경험했다. 시대의 역사, 개인의 역사를 통해 고전을 접하면서 마주한 ‘통찰’이 바로 그 기적을 떠받치고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순애보를 빙자한 스토킹, 『멋진 신세계』가 연 디스토피아의 포문, 『파리대왕』에서 느낀 인간에의 환멸, 마치 코로나19 시대를 예견한 듯한 『페스트』. 고전으로부터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사회 안에서의 인간, 그리고 역사와 자연 앞에서의 인류를 철학할 수 있었달까. 설레는 것은 앞으로 남은 여정이 훨씬 많다는 것. 이제껏 고전에 앞에서 순백에 가까웠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싶을 정도다. 재미있는 드라마가 안 끝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확인해본 남은 시간이 절반이 넘을 때 안도감 같은 거랄까.
생각해 보면 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작곡가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게 되면서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은 이야기를 참 많이 들려주셨다. 차이코프스키가 사랑에 실패한 사연, 슈만과 클라라와 브람스의 삼각관계, 슈베르트의 불행했던 삶 등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음악이 훨씬 잘 들리게 됐다. 아쉽게도 국어와 문학 시간에 작가와 작품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은 없었다. 무엇보다 책은 이야기의 총체인데 정작 이야기의 이야기는 접하기 어려웠다. 입시에 불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즘 다양한 북토크가 기획되고 성행하는 추세다. 언텍트 시대, 장소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 것이 책 산업 마케팅에도 침투한 결과다. 북토크를 통해 저자나 번역가, 편집자 등을 만나고 나면 책 내용은 달라진 게 없음에도 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처럼 저술 배경이나 작가 개인사를 들으면 책과 친밀해지는 효과. 그것은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이처럼 책이든, 음악이든, 사람이든 이야기에 빠지면 사랑에도 빠질 수 있다. 그 사랑은 세상을 넓게도, 깊게도, 다채롭게도 만든다. 특히 고전은 인간에 대한 통찰이 집약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전은 예나 지금이나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 같다. 작가들이 현재까지 살아 있는 경우도 드물고, 업계에서도 마케팅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처지니 ‘재미난 고전 이야기’의 파급력은 그저 입소문 정도에 의지해야 하니까.
내가 그 ‘재미난 고전 이야기’의 전달자가 될 자격을 갖추기엔 한참 미흡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함께 읽자고 권하고 싶다. 힘께 가다보면 우리만의 길을 내고 흥미로운 지도를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고전이 지닌 스테디셀러의 권위를 독자가 독자에게 서로 넘겨주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함께 할 길이 막막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연락주세요. 진지하게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