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책부록
영화를 참 좋아했다. 개봉영화와 극장 시간표를 확인하는 게 일과 중 하나였다. 이사를 할 때마다 가장 가까운 극장의 위치를 파악했다. 영화제도 많이 쫓아다녔다. 그런 나를 보고 지인들은 말했다. 그 열정이면 영화 한 편은 만들었겠다고. 하지만 나는 영화 쪽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 명의 관객으로 만족했다.
커피와 빵을 좋아했다. 대학 때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 맛에 눈을 떴다. 이후 하루 한 끼는 커피와 빵으로 때우게 됐다. 독특한 빵집과 카페를 찾아다녔다. 배가 불러 먹을 수 없을 땐 빵을 아이쇼핑한다고 하면 어이없다며 웃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니 빵이랑 커피를 직접 만들면 어떻겠냐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맛있게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골목을 좋아했다. 걷는 게 취미이자 특기다 보니 무의식중에 찾은 걷기 좋은 곳은 주로 골목이었다. 일부러 영화 상영 시간보다 여유 있게 목적지에 도착해서 주변을 걸었다. 그러다 괜찮은 카페를 찾아 커피를 한 잔 마시곤 했다. 여유롭고 넉넉한 시간 동안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주로 다이어리를 정리하거나, 편지를 쓰고도 남는 시간에 책을 읽었다.
책을 좋아한 적은 없다. 별책부록. 나에게 책은 별책부록이었다.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장치 정도랄까.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서 들고 다녔던 게 책이었다.
책 읽는 사람, 책 권하는 사람
“언니, 중학생이 읽을 만한 책 뭐가 있을까?”
요즘은 친구들이 나에게 이렇게 물어온다. 재밌게 읽은 책이 뭐냐,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은데 어떤 책이 좋겠느냐도 빠지지 않는다. 아이들 글쓰기 수업시간 함께 읽을 책을 공유하면 무조건 산다는 엄마도 있다. 이들의 신뢰가 참 고맙고 무겁다. 믿음을 확인한 순간부터는 좀 더 열과 성을 다해 책을 권하게 됐다. 좋은 글귀를 필사해서 보내기도 하고, 좋은 시 구절을 녹음해서 보내주기도 한다.
책 권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책모임 덕분이다. 그림책모임에 빠져든 이후 월 평균 3-4개의 책모임을 꾸준히 유지했다. 심하게 게으른 내가 책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다보면 “그 날은 책모임이라 안 돼”와 같은 대답을 자주 했나보다. 그렇게 책 읽는 사람이, 책 권하는 사람이 됐다.
책 산책
언제나 달리기는 자신이 없었다. 영화를 좋아할 때도, 커피에 탐닉할 때도 나는 달리기처럼 열정적이지 못했다. 책과 함께도 역시 나는 걸었다. 어떤 때는 지나치게 천천히, 어떤 때는 아예 멍하게 서 있기만도 했다. 욕심이 앞서 오늘은 좀 달려볼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수십 권 씩 쌓아놓기도 하지만 성공한 적은 없다. 그저 그 마음만으로도 뿌듯함을 채울 때가 여전히 많다.
느리게 책과 함께 걷는 길은 무척 다채로웠다. 네온사인 번쩍이는 번화가가 됐다가, 바람 잦아드는 조용한 숲이었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가 되기도 했다. 어디가 됐든 외롭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가 구분한 개념으로 보면, 읽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고독해지는 게 아니라 외로워집니다. 추방되는 것에 가까운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와요.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라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역량인데, 바로 이것이 읽기와 관련해서 더 깊이 얘기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해요. (유튜브는 책을 집어 삼킬 것인가p.91)
『유튜브는 책을 집어 삼킬 것인가』라는 책을 읽으며 '읽기'라는 자각의 구체화 다음은 ‘한나 아렌트’를 만나는 것이었다. 과연 그가 한 말의 앞뒤 맥락은 무엇인가 궁금해지니까. 한나 아렌트의 책을 검색하고 읽을 만한한 것을 고른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다보면 '하이데거'의 책도 언젠가는 읽어봐야겠다고 염두한다. 고등학교 윤리책에서 이름만 얼핏 들었던 그 하이데거를 말이다. 이렇듯 책 산책은 늘 걷던 길도 새롭게 보이게 하고, 전혀 새로운 길을 설렘으로 안내한다.
책 속에서 길을 내고, 그 길에서 책을 내다.
앞서 밝혔듯이 그렇게 좋아했던 것들을 직접 생산해보겠다는 욕심은 가져본 적이 없다.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책 산책을 하다보면 ‘서점을 꾸려 보고 싶다.’거나 ‘책 한 권 써봤으면 좋겠다.’는 바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비록 무모할지라도 부딪쳐보고 싶은 열망에 떨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출간을 앞두고 글을 모아보니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 앞에서 온 몸이 부끄러움으로 떨린다.
『책 산책』은 내가 책을 사랑한 모습이자, 책을 추천하는 방식 중 하나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렇기에 보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족한 글이고, 미흡한 견해일지 모른다. 서평이라는 단조로운 형식을 취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통일감 결여라는 혹독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음을 안다.
부족함과 미흡함이 부디 낮은 허들로 작용해 편안하게 다가가길 바란다. 『책 산책』을 통해 책을 사이에 두고 함께 걷고 싶다는 동반자가 생긴다면 더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