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달 april moon Oct 24. 2021

‘삐삐’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는 브랜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시공주니어 



“삐삐 너는 왜 그렇게 큰 구두를 신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수 있으니까.” 



사이즈와 디자인은 같지만 색깔이 다른 운동화를 한 켤레씩 샀다. 오른쪽은 주황색, 왼쪽은 연두색으로 신었다. 그 반대였던 날도 있었겠지. 어느 쪽이 연두색이었든 간에 사람들은 나에게 특이하다, 엉뚱하다와 같은 수식어를 붙였다. 만일 삐삐에 버금가는 괴팍함을 가졌더라면 나는 사회생활이 거의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삐삐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1945년)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고 한다. 입을 열었다 하면 거짓말인, 교양을 모르는 천방지축 소녀 때문에 아이들 버릇이 나빠질까봐 그랬다나? 누가 그런 우려를 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대환영. 삐삐의 인기는 지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빨간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짝이 다른 긴 양말에 커다란 구두를 신은 채, 말을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있는 소녀. 그렇다. ‘알’이 아니라 ‘말’이다. 상식을 벗어난 패션과 남다른 힘을 자랑하는 삐삐는 엉뚱한 상상력을 실행하는 과감함까지 갖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영혼만 자유로운 게 아니다. 엄마는 하늘나라에, 아빠는 식인종의 섬에 계신다고 하니 아홉 살 삐삐는 ‘나 혼자 산다’는 자유도 만끽하고 있다. 곧 해적이 될 날을 고대하며! (아, 맞다. 원숭이 닐슨 씨와 함께이니까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삐삐와 함께라면 일상은 모험이 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옆집의 토미와 아니카 남매는 매일 같이 삐삐를 만나러 간다. 무엇이든 찾아내는 발견가 놀이나 떡갈나무 위에서 티타임을 즐기면서 마주하는 위험에도 결론은 늘 삐삐를 우러러보게 되는 남매다. 그들이 서커스 도중 난입?한 삐삐에게 환호한 것은 분명 경외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에게 보이는 삐삐는 다과회에서 케이크를 망가뜨리고, 바닥에 가루설탕을 뿌려 엉망으로 만들고, 어른들 대화에 끼어드는 버릇없는 아이일 뿐이다. 


난 상하이에서 어떤 중국 사람을 봤어. 그 사람 귀는 어찌나 큰지 망토로 쓸 수 있었어. 비가 오면 그 사람은 자기 귀 아래로 기어들어갔는데, 정말 따뜻하고 아늑하대. 당연히 귀는 비를 맞으니까 그렇게 좋지는 않았겠지. 날이 궂으면 그 사람은 친구들을 불러서 자기 귀 아래에서 비를 피하게 해 주었어. (P.79)


귀가 큰 남자 이야기는 아빠를 찾는 한 여자 아이를 길에서 마주치면서 비롯됐다. 삐삐의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듣던 여자 아이는 ‘말도 안돼’, ‘거짓말이지?’를 연발했다. 누가 들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 끝에 삐삐 역시 말한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지.” “이런 거짓말을 믿는 사람도 있어?” 곧 실토하고 말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대체 왜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절로 생긴다. 그러나 삐삐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그저 재미다. 비록 속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좀 언짢을지는 몰라도. 


“삐삐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 그럼 친구들이 싫어할 거 같아. 나도 동생이 거짓말을 할 때 기분이 나쁘거든.” 


요즘 우리 집 자매 사이에는 천둥번개와 국지성호우가 잦다. 이성과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에 있는 사춘기 언니와 유아기를 못 벗고도 언니와 동등해지고 싶은 동생의 충돌 때문이다. 특히 동생은 언니를 이겨보겠다고 못 본 것도 봤다고 우기고, 모르는 것도 안다고 뻐긴다. 그런 동생 행동이 언니한테는 습관적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였고 삐삐의 허풍이 동생과 닮았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첫째 아이는 삐삐의 인상이 별로라고 했다.  


어른이 되어 본 삐삐는 아이의 극히 개인적인 감상과는 조금 다르다. 삐삐의 반항기에 많은 아이들이 대리만족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토미와 아니카 남매처럼 말이다. 또 학교 밖 아이들들 상징하는 것도 같다. 더불어 아이들을 교육한다는 이유로 제도화, 획일화시키는 학교와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도 느껴졌다. 솔직히 첫째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린 이이고 초등학생인 네 입장에서는 삐삐의 태도와 삐삐를 바라보는 세상을 어떻게 생각해?” 물론 질문은 결국 꺼내보지도 못했지만. 


하긴 현실에서 삐삐와 같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당장 TV 육아상담 프로그램에 의뢰서를 넣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한민국 부모들이 손에 꼽는 육아 멘토 오 박사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 늑대에게 키워진 소녀의 사회화는 결국 실패했는데, 삐삐는 가능할까? 그래도 엉뚱하고 기개 넘치는 아이콘으로 남아 지금처럼 사랑받는 편이 더 좋겠지. 삐삐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을 테니까. 


-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표지를 살펴보던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그게 상 이름이라서 그래. 작년에 백희나 작가가 그 상을 받았잖아.” 


2002년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사망한 뒤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름을 딴 상이 만들어졌다. 매년 한 명의 아동청소년문학 작가에게 수여하고 있다.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을 수상한 백희나 작가가 한 TV 인터뷰 프로그램에 나온다기에 아이들과 함께 챙겨봤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장수탕 선녀님』, 『알사탕』 작가가 세계적인 상을 받았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무척 집중했다.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상금에 대한 부분이었다. 한화로 6억 원이 넘는 금액을 세금도 떼지 않고 받았다고 하니 진행자들이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나에게 그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 상금이 스웨덴 국민 세금에서 지출된다는 것이었다. 백희나 작가 역시 그런 큰 상금을 외국 작가들에게 줄 수 있는 배경에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린드그렌을 향한 스웨덴 국민들의 애정은 100권이 넘는 동화를 쓴 작가로서의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아동 인권과 동물보호 운동가로 활동하며 생전에는 추앙을, 사후에는 추모를 전 세계적으로 받게 됐다. 특히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 수상 연설 “폭력은 절대 안 돼”는 무척 유명해서 책으로도 발간됐다. 이를 계기로 스웨덴에서는 아동체벌금지법을 제정했다고 하니 그 연설의 파급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동물보호법 초안은 ‘린드그렌 법안’으로 불렸고, 원자력 반대는 물론 고르바초프에게 핵전쟁 반대 메시지를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행보는 한 인간이 가진 능력과 유명세를 공익적으로 펼쳐낸 좋은 예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러니 스웨덴 국민들이게 소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보유국’이라는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할까. 


아이와 이 책을 읽어보기 전까지는 삐삐에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작가의 행보를 알게 된 후로 가능한 번역된 작품은 다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20세기 중반에 아동인권과 동물보호권에 대해 이야기했던 작가에게 받을 영감을 생각하며, 그 선한 영향력을 함께 나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는 브랜드를 나도 한 번 믿어보기로 한다. 삐삐가 별로라고 했던 첫째의 다른 책 반응도 궁금해진다. 



이전 02화 우리들의 소녀시대 - 모녀북클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