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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Oct 23. 2021

우리들의 소녀시대 - 모녀북클럽


<모녀 북클럽>의 회원은 열두 살 딸과 나. 우리는 독서를 작정하지 않는다. 모임의 정해진 날짜도 없고, 토론이나 독서록 나누기도 안 한다. (아니 못 한다.) 우리들의 책모임은 ‘같은 책을 읽는 것’뿐이다. 그리고 오가는 한 두 마디의 대화. 


“빨강머리 앤 다 읽었네? 어떤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아?” 

“앤과 길버트가 화해하는 장면이 젤 좋더라.” 


“엄마, 마틸다는 영화보다 책이 더 재밌는 것 같아.” 

“정말? 어떤 점이 그랬을까?” 

“상상할 게 더 많아서 그런가?” 


대화는 아이가 목욕을 하고 나온 뒤에 머리카락을 말리면서라든가, 내가 널브러진 책들을 정리하는 동안 나누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화마저도 <모녀 북클럽>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모녀 북클럽>은 나 혼자 열심이다.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린 왕자』를 적극 추천했다가 극도로 거부하는 것을 본 뒤로 나는 아이에게 웬만하면 책에 대한 것은 ‘ㅊ’자도 꺼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됐다. 우리들의 책모임 역시 제의하면 단칼에 거절할까봐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나중에 아이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지금 우리 둘의 책읽기를 일단 <모녀 북클럽>의 파종 시기 정도로 정의하고 싶다. 



딸 스타일, 엄마 스타일 


멋지다 

저녁마다 책 한권 뽑아 

잠자기 전에 읽는 내 인생 

참 멋지다 


『멋지다』라는 요시타케 신스케 책을 패러디 해 써본 거라고 아이가 말했다. 콧구멍, 빡빡머리, 앞니 빠진 갈가지 등 아이들이 가진 다양한 특징을 멋지다고 표현하는 책에서 자신의 일상을 발견해 낸 아이에게 나도 ‘멋지다’고 엄지를 들어보였다. 


아이의 별명은 책벌레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한글을 뗀 뒤 그림책으로 시작해 2학년 말에는 짧은 동화를, 3학년 겨울방학에는 400쪽 이상의 책을 읽게 됐다. 아이가 실내 여가를 책에 할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딱히 할 게 없어서였다. 집에는 TV가 없고, 아이 손에는 스마트폰이 없다. 사실 TV와 스마트폰이 없는 절대적 이유가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눈을 사로잡을 것이 없으면 다른 걸 하고 놀겠지...하는 정도였다. 물론 지금 당장 <스마트폰 VS 책> 하고 밸런스 게임을 한다면 아이는 0.1초도 고민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고를 것이다. 야외 활동도 어찌나 좋아하는지 놀 시간이 없다며 유일하게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끊어버렸는데도 노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거린다. 쳇, 그런데도 책벌레라니! 


내가 딸의 나이였을 때, 집에 TV는 있었지만 화면조정 시간에 제약을 받았고, 내 손에는 스마트폰이 없었는데도 나와 책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나에겐 약간의 난독증세가 있어 활자를 뇌에 입력하기까지 버퍼링이 꽤 걸렸다. 그러다보니 책에 흥미를 느끼기 전에 지루함이 밀려왔다. 난독증은 여전하지만 책의 재미에 빠진 요즘은 ‘속독을 배울까’하는 진지한 고민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런 나에 비해 아이는 금새 책을 읽어낸다. 500쪽 분량의 책은 하루 이틀 만에 완독이다. 나는 며칠 혹은 일주일 이상 걸리는데... 솔직히 부럽다. 


읽기보다 쓰는 것을 훨씬 좋아하는 나는 일기, 편지는 물론 이야기나 시 쓰기도 즐겼다. 지금도 가방에는 노트와 필기구를 꼭 챙기는 편이다. 그런데 아이는 쓰는 것이라면 질색한다. 일기나 독서록 숙제를 할 때마다 못하겠다는 말을 수십 번도 넘게 한다. 언젠가는 눈물을 흘리며 3시간을 붙잡다 10문장 정도의 일기를 쓴 적도 있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니까 그림책을 함께 읽으며 독서노트를 꾸려볼까? 했던 바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해졌다. 하지만 숙제 같이 강요되지 않으면 간혹 끄적끄적 자신의 글을 쓰는 아이니까 언젠가는 읽고 쓰는 날도 올지 모른다. 


쓰는 건 그렇다 치고, 책모임의 기본 중 기본은 책 대화다. 하지만 아이는 읽은 것을 말로 표현하는 즐거움에 아직 눈 뜨지 못한 것 같다. 말발이라면 아빠, 엄마, 심지어 동생도 당하기 힘들기 때문일까? 글이든 말이든 책을 나누고 싶은 엄마의 욕심이 불러온 <모녀 북클럽>은 엄마가 욕심을 상당 부분 내려놓음으로써 같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모양새다. 



나를 책으로 이끌어준 아이


‘이렇게나 다른 딸과 엄마의 책모임이 번듯하게 실현될 날이 올까’ 싶은 의구심에도 애착으로 굳이 지속하려는 까닭이 있다. 내가 책 세계에 흠뻑 빠지게 된 건 순전히 딸 덕분이기 때문이다. 


다섯 살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 시작했을 때였다. 환상의 무대가 펼쳐지고, 울컥한 감동이 있으며, 다양한 정보까지 담긴 그림책 세상에 적잖이 놀랐다. 잠자리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때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궁핍한 내 어린 시절의 독서를 이제야 채워주고 있다고. 그렇게 나의 유아기도 함께 다독이다 보니 그림책에 매료됐다. 그 호감은 아이 학교에서 그림책 읽어주는 봉사활동으로 이어졌다. 봉사활동은 자연스럽게 책모임의 형태를 갖추게 됐고, 그림책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책모임에 대한 매력에 빠졌다. 얼마 후 서평을 쓰는 책모임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하고 독서력을 쌓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이는 동화를 읽고 있었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이의 어린시절을 보내며 그림책은 함께 읽었다 치면『어린 왕자』나 『빨강머리 앤』을 제외하고 동화를 읽은 적은 없었다. 책모임에서 『코스모스』나 『총, 균, 쇠』와 같은 책을 흥미롭게 읽었지만 한편으로 찜찜한 결핍이 느껴졌던 것이 동화를 건너뛰었기 때문일까? 사춘기 없이 어린이에서 바로 어른이 되어 늦게 방황하는 경우 같은 걸까? 엄마가 되어 돌아보는 나 자신의 성장이 짠하기도 했지만 아이가 동화에 대해 물어보면 공감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렇게 나이 마흔을 넘겨서야 앨리스와 마틸다, 삐삐와 같은 소녀들을 처음 만나게 됐다. 



딸에게 선물 받은 소녀의 시간 


엄마인 친구들이 만나면 대화 주제는 아이들의 발달과정에 맞춰 변화된다. 아이가 유치원생이면 나도 유치원을, 아이가 입학하면 나 역시 학교를 다니는 건가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가 소환되는 나의 어린 시절 앞에서 다양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처럼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두 번 자라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 딸 덕분에 두 번째 소녀를 살고 있다. 첫 번째보다 훨씬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엄마와 딸의 소녀시대를 채워줄 동화들이 줄 지어 서있기 때문이다. 『비밀의 화원』,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물론 아이가 좋아하는 로알드 달의 책들, 그리고 『몽실언니』, 『오세암』 등의 우리 동화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뉴베리 상과 우리 창작 동화를 주목하기도 한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재밌게 읽는 아이니까 『나니아 연대기』,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물도 곧 나란히 독파하게 되리라. 나의 10대 시절을 빛내준 셜록 홈즈나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추리소설도 딸에게 추천해줘야지. 


이 정도면 집착에 가까워 보이는 <모녀 북클럽>의 염원은 점점 커가는 아이와 나 사이에 놓였으면 하는 교각의 설계도다. 남편과 나는 부부 사이에서는 물론, 아이들에게도 독립적 개인을 존중하려 애쓰는 편이다. 물론 연대의 가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다각도로 고민한다. 나는 우리 가족의 존중과 연대가 책 위에서 견고해지길 바란다. 특히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더욱 책에 의지하고 싶다. 부모가 아무리 인생 선배라 해도 책이 품은 세상의 지혜를 따라잡기는 어려우니까. 우리는 책 앞에 평등하고 자유로울 것이니, 나는 희망한다. <모녀 북클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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