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있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 아니에요?
‘엄마 죄송해요. 보려다가 빠졌어요.
추신: 재밌네요 백 원 빼지 마세요.’
책상 위에 올려뒀던 『빨강머리 앤』 책표지에 붙은 메모였다. 옆에는 책에 끼워뒀던 책갈피가 빠져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빨강머리 앤』은 두 권이었는데 최근에 더모던 출판사 책에 손이 탄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제목에 같은 내용인데 옆자리에 있던 30년 된 유물을 권할 때는 거들떠도 안 보더니. 아이에겐 엄마가 첫 용돈으로 샀던 책이라는 역사도, 열 번이 넘는 이사에도 꿋꿋하게 지킨 책이라는 사실도 크게 중요하지 않겠지. 하긴 지브리 스튜디오의 수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1979년 애니메이터로 참여했다는 만화영화 스틸컷(더모던 책)은 내가 봐도 유혹적이다.
아이가 책갈피로 활용한 백 원짜리 동전은 중반을 훌쩍 넘긴 부분에서 발견됐다. 이미 나는 몇 번이나 읽었던 책이니까 아이에게 새 책의 우선권을 넘겼다. 아이는 신나서 책을 읽었다. 조잘조잘 얘기하는 타입이 아닌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소감을 물었다.
“길버트랑 화해하는 장면이 제일 좋았어.”
“맞아. 엄마도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이 책을 읽어.”
나도 꼭 그랬다. 책을 펼칠 때도, 가지고 있던 DVD를 시청할 때도 앤과 길버트가 화해하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달렸다. 특히 만화로 볼 때는 몰랐는데 활자로 보니 앤이 길버트를 한결 같이 미워한 건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는 이렇다 할 로맨스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둘 사이의 미묘함이 내 마음에는 이상하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앤이 엉뚱하고 발랄한 매력으로 매슈와 마릴라는 물론 에이번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 같이 빛났지만 나에겐 역시 마지막 장면이 가장 큰 위로가 됐다. 그러고 보면 사춘기 내 삶의 화두가 화해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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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아이는 다시 책을 꺼내 읽었다. 이제 열두 살이 됐고, 계절도 달라졌으니 앤의 이야기에서 혹시 색다른 점을 발견했을까 궁금했다.
“이번에는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어?”
“음… 앤과 다이애나가 서로 친구 되기로 약속하던 장면 있지. 맹세라는 말을 다이애나가 잘못 알아듣잖아. 뭐였지? 아! 저주. 맞아 저주라고 잘못 이해하는 장면이 웃겼어.”
“아, 거기!
한 단어에 ‘맹세’와 ‘저주’라는 뜻이 함께 있다니 엄마도 그 부분이 신기하더라.”
얼마 전 아이의 고백이 떠올랐다. 학교에는 자신을 빼고 모두 단짝 친구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넌 괜찮냐고 물으니, 자긴 괜찮다고. 쉬는 시간에 놀 친구가 없으면 책을 보면 되고, 놀이터에 친구들이 없으면 동생들이랑 놀면 된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아이를 보며 한 편으로는 놀라웠고, 한 편으로는 찡했다.
학창시절 적성검사 설문지를 서너 번은 작성했던 것 같다. 그때마다 가장 고민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교우관계’ 항목을 골랐다. 성적도, 가정문제도 아닌 친구 사이가 나에게는 세상 큰 고민이었다. 그 당시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편지나 쪽지에 ‘나의 앤’, ‘나의 다이애나’라는 애칭을 쓰고 싶어했다. 하지만 운명의 화살이 서로를 향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니. 내가 친구에게 소외되거나 나 역시 누군가를 소외시키거나 했던 것 같다. 어느 쪽이든 힘겨웠다.
“글쎄 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평생 다이아몬드로 위로받지 못한다 해도 말이야. 나는 진주 목걸이를 한 초록 지붕 집의 앤에 아주 만족해. 매슈 아저씨가 이 목걸이에 담아주신 사랑이 분홍 드레스 아주머니의 보석에 못지않다는 걸 아니까.” (P. 469)
흰 모래 마을 호텔에서 시낭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호텔에서 만난 부인들의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와 휘황찬란한 드레스에 마음을 뺏긴 제인이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한 푸념에 앤이 했던 말이다. 지금 보니 앤은 참 자존감이 높은 아이였구나. 나는 겉으로는 세보였지만 자존심만 강했지 자존감은 그에 비례하지 못했다. 그걸 아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앤은 열여섯 살에 자신을 지킬 줄 알았다니. 분명 매슈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과 환대 덕분이리라.
더 이상 앤과 과거의 나를 견주어 나는 왜 앤처럼 조숙하지 못했는가 하는 경쟁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이제는 매슈와 마릴라처럼 아이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차례다. 스스로의 대답은 ‘노력 요함’. 그리고 또 하나의 숙제는 아이의 성장에 나의 10대를 씌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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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프린스에드워드 섬이 어디 쯤 있어?”
지도를 찾아보니 캐나다의 남동쪽이다. 작가가 실제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태어났고 외조부모와 함께 살았으며 바로 그곳에서 『빨강머리 앤』이 탄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이 크게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꽤 오랫동안 앤과 함께 기쁨의 하얀 길을 걷고, 반짝이는 호수에 넋을 잃었으며, 제비꽃 골짜기 가운데 서 있었는데. 어떤 때는 자작나무 숲의 놀이터에서 이가 나간 그릇으로 소꿉놀이를 하던 앤과 다이애나를 지켜보는 구름이 되고 싶기도 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빨강머리 앤』은 장소적 특징보다는 캐릭터의 매력이 압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엉뚱하지만 유쾌하고, 수다스럽지만 사랑스러운 앤은 무려 100년이 넘도록 정상급 캐릭터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에 예쁘지도 않고 통통하고 발그레한 볼도 갖지 못한. 20세기 초반 미의 기준에 한참은 모자라 보이는 앤의 수수함이 나에게는 충분히 매력을 어필했다. 평범함이라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공상이라는 판타지로 특별해진 앤의 모습에서 나와 같은 수많은 소녀들이 실현 가능한 환상을 꿈꿨던 걸지도 모른다.
“너의 낭만을 다 버리진 마라, 앤. 낭만이 조금 있는 건 좋은 거란다. 물론 너무 많으면 곤란하지. 하지만 조금은 남겨두렴. 조금은 말이다.” (P. 397)
백합공주 놀이를 한다고 구멍 난 배에 탔다가 물속으로 가라앉을 뻔했던 앤은 말했다. 다시는 낭만을 좇지 않겠다고, 낭만을 찾는 건 아무 소용없다고. 그런 앤에게 매슈 아저씨는 무심하게 낭만을 조금은 남겨두라고 부탁한다. 최근에 다시 읽으며 눈길을 끈 부분이다. 이제는 낡고 닳아빠진 20세기 유물 같은 말 ‘낭만’. 그 낭만이 앤을 앤답게 만들고, 많은 사랑을 이끌어낸 정체였구나 새삼 깨달았다. 며칠 뒤 우연처럼 아이가 말했다.
“앤은 참 낭만적이라서 매력이 있는 것 같아.”
길을 걷다 주저앉아 이름 모를 꽃에 마음을 빼앗기고, 하늘을 올려보며 심호흡을 하고, 자동차 창문을 열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을 느끼는 아이를 자주 본다. 대부분이 아빠를 닮았지만 그런 감성은 나를 닮았구나...하고 느끼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매슈 아저씨의 당부처럼 약간의 낭만을 잘 가꿔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조만간 와인과 망고 주스를 놓고 마주 앉은 우리는 외치겠지. 딸과 엄마가 따로 또 같이 하는 소녀시대의 등불이 될 낭만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