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별

투명한 사랑

by 르완느

사랑에서 실패란 이별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가 서로에게 투명해지는 순간, 사랑은 실패한 것이다. 서로에게 이별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머문다 할지라도. 내가 너에게 투명한 존재가 되었을 때, 우리의 사랑은 실패한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의 전화번호를 잊지 않고 꾹꾹 키패드 하나하나 입력했다. 너 역시도 울리는 전화벨에 수화기 들어 무심결에 내 이름을 불렀지. 마치 우리의 뜨거웠던 여름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안부를 주고 받았지만 서로의 온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 손에는 수화기를 든 채,너와 나의 시선은 각자의 방향으로 온기를 내뱉았으리라.


언제를 우리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정의해야 할까.

더 이상 서로를 추억하면 안 될 수만 가지의 이유가 있는 이별이라 해도,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다고 정의할 수는 없는 노릇.


우리에게는 사랑을 주고받던 네잎클로버 수첩이 있었지. 일주일치의 그리움을 글자로 담아 너에게 건네면, 너는 나의 사랑에 응답하듯, 하얀 메모지 까만 펜으로 빼곡히 채워 일주일의 온기를 더해 다시 돌려주었지.


언젠가는 호숫가 옆 커피 자판기에, 지워지지 않을 네임펜으로 끄적인 너의 글을 사진으로 담아 나에게 보내주기도 했지.


‘I’ll always be here for you.‘


사진 속 글귀에는 나를 향한 눈빛, 너의 마음을 담았겠지. 그날의 다정함이 오늘의 추억이라면, 우리는 과연 사랑에 실패했다 할 수 있을까.


나를 두고 떠난 건 너였고, 너에게 이별을 고한건 나였지. 애석하게도 나의 이별 통지는 떠난 너의 마음보다는 한참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를 잊어야 했지만 저장하지 않은 너의 번호를 기억하려 가끔씩 되뇌어 보곤했지.


퇴근길 지하철역, 익숙하리만큼 되뇌었던 번호는 강한 진동과 함께 몇 년 만에 불쑥 예고도 없이 그렇게 찾아왔다. 어제도 수화기 건너편에 있었던 것처럼 익숙한 너의 목소리였지만, 나는 다시 한번 너에게 이별을 고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마음은 사랑 어린 투정이었는지, 분노였는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다정한 듯 차가웠고, 따뜻한 듯 험난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지는 않다.


너를 향한 나의 말은 허공에 헛날리는 공허함이 되어 메아리 조차 돌아오지 않았고, 나의 존재는 너의 옆에서 따스한 온기조차 전하지 못할 만큼 투명했었지.

너는 다시 돌아왔지만, 나는 이미 떠났다.


서로를 사랑이라 여겼던 시절, 산기슭 어딘가 함께 묻어 두었던 추억의 조각들. 그곳을 너는 잊지 않았나 보다. 마지막이 되어버린 그날의 편지를, 너 홀로 찾아 꺼내 보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내뱉은 이별이 그리움이 되는 날이면, 노트북을 열어 네가 올린 기록의 흔적을 찾곤 했지. 네가 홀로 찾아 꺼내 본 상자 속 빛바랜 편지를 찍은 사진 한 장. 낡은 종이 위에 남은 우리의 마지막 기록. 너도 나를 그리워했으리라. 그렇게 나를 위안한다.


이별이라 해도 사랑했던 날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너와 나의 사랑은 차가웠던 이별처럼 시린 날의 사랑으로 기억에 묻어 둔다. 함께 했던 이십 대의 여느 날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기억 속으로 희미해져 가겠지.


우리의 존재가 서로에게 투명해진 순간, 이별이라 칭했어야 했다. 너도 그래야 했고, 나도 그래야 했다. 서로에게 이별을 말하지 않은 채, 같은 공간에서 머문다 할 지라도. 나는 그렇게 너에게 투명한 사랑이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