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그리고 서울
졸업 전 마지막 겨울 방학을 앞둔 12월. 주위에 하나 둘들려오는 입사 소식에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밤을 지새우는 날이 늘어갔다. 지방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서울에 살고 싶었다. 서울, 그곳에 머무려면 내 한 몸 내가 건사할 수 있어야 했다. 자판을 두드리며 구인 사이트를 뒤적거렸다. 키워드란에 깜빡이는 마우스커서를 한참을 쳐다보다 단어 하나를 넣었다.
‘인천공항’
이력서는 초라했다. 남들 다 다녀오는 어학연수 경험도, 기업들이 반길만한 전공도 아니었다. 나는 취업 시장에서 검색되지 않는 존재에 가까웠다. 졸업 후 서울에서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직무가 아닌 장소를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검색창에 '인천공항'을 입력했다.
막연한 설레임에 대한 동경. 내게 인천공항은 그런 곳이었다. 한 여행자 보험 부스에 단기 파견직을 구한다는 공고가 떴다. 한 달에 150만 원 남짓의 월급. 월세와생활비를 해결하고 영어학원 정도 다닐 돈은 되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 다행히 일자리를 구했고 신림동에 자취방을 얻었다.
찬공기와 어둠이 뒤섞인 새벽 네시 반, 공항버스 정류장에 여행객들과 공항 청소 노동자분들 사이 줄을서서 첫 차를 기다린다. 정장을 차려입고 출입증을 목에 걸고 테이크아웃한 커피 한잔 손에 들고 가는 회사원은 되지 못했다. 자취방에서 취업원서만 쓰고도 끼니를 해결할 만한 돈이 당장 수중에는 없었다. 새벽의 공항은 활기찼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설레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여행지와 체류기간, 여행목적을 확인하고 여권의 정보를 입력한 종이 한 장을 출력하는 일을 순서대로 반복한다. 설렘과 활기로 가득 찬 공항 출국장 옆 작은 한평 남짓의 부스에서 부러움과 씁쓸함의 체감하는 대가로 나는 서울에서 자립을 시작 할 수 있었다.
12시간을 꼬박 일하고 나면 다음 날은 쉴 수 있었다. 취업을 위해 신촌에 있는 영어 학원에 등록하고 나서는 길, 그곳에서 대학동기를 만났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동기는 다음 달이면 영국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떠난다는 말을 남겼다. 졸업생이자 미취업자, 같은 신분 속에서도 서로의 계급은 한참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기분이다. 월급 받아 토익 점수를 높이는 길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길 수밖에.
학원을 다녀오는 길 언덕배기 마트에서 저렴한 반찬거리를 사다 집에서 밥을 해 먹고 노트북을 열어 이력서를 이리저리 수정한다.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곳에 나를 욱여넣어 틀에 갖춘 설명서와 같은 진부한 자기소개서를 다듬는 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간간히 면접을 보는 날도 있었지만, 아쉽지만으로 시작하는 불합격 메일만 차곡차곡 쌓여 갈 뿐. 더 이상 정기 채용공고는 내 자리가 아닌 듯 했다.
4개월 뒤면 단기 파견직도 계약이 종료되니 마음이 분주해졌다. 졸업 전이나 졸업 후나 이력서에 쓸 수 있는 내용이 달라진 건 없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직무 대신 일할 수 있는 장소 뿐. 살고 싶은 곳, 서울을 내가 택한 셈이니 회사와 직분을 따질 처지는 아니었다. 다시 한번 일하고 싶은 장소를 넣고 검색을 눌렀다.
한 물류 회사에서 계약직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다. 퇴사로 인해 한 명을 충원하는 자리였다. 수백 명의 정규직 자리를 충원하는 곳에는 내 자리는 없어도 계약직 직원 한 명이 퇴사하는 곳, 다행히 그 한 자리는 내가 될 수 있었다. 부모님께 취업소식을 전하고 나는 엄연한 직장인이 되었다. 드라마 속에서 나오는 정장을 입고 기쁨에 찬 미소로 두 손 벌려 만세를 취할 만큼의 환희는 없었다. 이곳에서 자립해서 살 수 있다는 안도감 정도. 그리고 남모를 씁쓸함이 남았다.
주어진 일은 복사와 팩스 보내기 서류 속 숫자를 시스템에 입력하기.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커다란 복합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팩스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건지, 모든게 서투른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일을 하는데 대학 4년간의 교육은 별다른 쓸모가 없었다. 서류에 찍힌 숫자들을 시스템에 빠르게 입력하고 복사하고 팩스를 잘 보내는 게 더 중요했다. 아무도 나에게 일 잘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주어진 일만 수행해 내면 그뿐. 단기 파견직때와 비슷한 월급을 받고 있으니 다행히 월세를 내고 끼니를 해결했다. 회사를 다닐 몇 벌의 옷을 사고 계약직의 신분을 꺼낼 수 있는 가까운 친구 몇몇과 어울릴 수 있는 여력은 되었다. 넉넉한 생활을 못되어도 살고 싶은 도시에서 내 몸 건사하며 살아갈 능력은 되는 거라 위로했다.
세 번의 재계약을 거치는 동안 복사와 팩스 스캔은 눈감고도 너끈해졌고, 네 번의 해가 바뀌어서야 정규직이 되었다. 가끔 정장을 차려입고 외부 거래처도 방문하고 회의도 참석하고 개인 노트북도 생겼다. 대학 동기들의 입사 모습까지 가는데 4년이 걸렸다. 이젠 명함도생겼고 직무와 책무도 생겼다. 몇 장의 명함을 지갑 속에 넣어 다니고 동기 모임에서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사회계급에 도달했다. 가는 길은 늦었지만 버텨온 시간들이 쌓여 온전히 내 힘으로 살아낸 셈이다. 회사는 선택하지 못했어도 살 고 싶은 도시에서 살아냈다. 지난했던 4년이 의미 없진 않았다 위로한다.
여전히 삶은 단계단계마다 촘촘한 바늘구멍 같은 곳을 지나가야 한다. 통과의례 같은 바늘구멍을 올곧게 한 번에 통과한 적은 없다. 인파에 휩쓸리듯 지나온 건지 한참을 돌아 지나온 건지- 어쨌든 그 길을 지나왔고, 또 지나가게 될 것이다.
자립.
살아 내는 것인지 살고 있는 것인지 주체는 모호하지만. 스스로 살고 싶은 곳에서 나는 여전히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