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룸메이트

by 르완느

아이를 낳은 그 해가 넘어가던 겨울 어느 날, 아이를 재우고 어디로든 나가 숨통이라도 틔워야 할 것 같았다.


거실 티비 소리가 꺼지고 온 가족이 잠자리로 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두터운 솜털 조끼 하나 걸쳐 입고 슬리퍼를 신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해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고작 집 앞 상가. 2차선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앉은뱅이 빌딩의 1층 치킨집으로 향했다. 시부모님과 합가 해서 살고 있던 그곳에서는 숨죽여 우는 울음소리 마저도 방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게 싫었다.


맥주 한잔을 시켜놓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 시간 유일하게 전화를 받아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 나의 대학동기 룸메이트. 별것 아닌 듯 웃으며 전화를 하다 그만 참아왔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는 나와 통화 중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서 내가 있는 곳의 주소를 부르라고 했다. 지금 그곳으로 갈 테니 꼼작 말고 그곳에 그대로 있으라는 말과 함께. 그때 시계는 이미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친구는 전화를 끊지 않고 운전대에 올랐다. 운전면허를 딴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무렵, 내가 있는 곳을 오겠다고 첫 고속도로 주행길에 올랐다.


차가 없는 밤이었던 탓인지 아님 과속이었는지 40분 남짓한 시간만에 50km의 거리를 달려와 그녀는 치킨집 앞 골목에 나타났다. 차의 창문을 내리며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폭풍이 휩쓸고 간 마음에 안도감이 스며들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친구 입을 통해 나의 행색을 알아차렸다. 아침에 질끈 동여 묶은 헝클어진 머리, 안경을 쓰고 집에서 입던 옷에 아무렇게 걸쳐 입고 나온 조끼 하나 슬리퍼차림. 차가운 겨울밤, 나의 차림새는 마음만큼이나 처량했다.


치킨 한 마리를 시키고 우리는 이십 대의 여느 날처럼 시덥지 않은 별별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떠들었다. 성인과 마주 보며 이야기 한게 얼마만인지 모른다며 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초보운전자가 먼 거리의 초행길을 늦은 밤에 나설 만큼 그때의 나는 위태로웠나 보다.


6~7년쯤 지나서야 친구가 그날 밤 내 목소리에서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직감이 들어 그 먼 길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왔다 고백했다. 나는 늦은 밤 외딴곳에서 익숙하게 마음 나눌 이라고는 우리 둘밖에 없었던 그날, 다짐했다. 너의 삶에 가장 힘든 순간이 오면 나는 너의 손을 어떻게 해서든 붙잡을 것이라고.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다음 카페 03학번 새내기 모임방이었다.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나고 함께 기숙사에 올라갈 동기를 찾았다.


‘나는 박하늘. 부산 살아’

‘나는 김지나. 나도 부산 살아. 반가워. 같이 기차 타고 갈래?’

‘좋아, 다음 주 월요일 부산역 앞에서 만나자. 이 번호로 전화해.’

‘그래, 그날 보자.’


약속한 날, 우리는 부산역 앞에서 만났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빨간 츄리닝이 단연 돋보였다. 나는 손을 흔들어 인기척을 냈고, 그녀는 출출한 배를 먼저 채우자며 맛있다는 설렁탕집으로 데려갔다. 태어나 처음 가보는 설렁탕 집이었다. 뚝배기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이고, 그제서야 설렁탕과 곰국이 같은 말인지 알아차렸다. 깍두기 국물을 넣어 먹으면 맛있다며, 먹는 요령도 알려주는 그녀는 제법 스무 살의 어른 같아 보였다. 나는 지워지지도 않을 시뻘건 깍두기 국물을 소매 끝에 묻힌 채, 설렁탕 한 그릇을 비우고 일어섰다. 부산역으로 올라가 기차시간을 확인하고서 우리는 새마을호 기차표를 나란히 끊었다.


1학년 때는 원거리 배정에 따라 우리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이듬해부터는 성적을 반영해 기숙사 당첨 여부가결정되니, 신나게 놀았던 우리로서는 황급히 자취방을 알아보아야 했다. 우리는 어느 주택 뒷마당에 임시 컨테이너로 길게 만들어 놓은 간이 주거 형식의 가장 저렴한 방을 구했다. 80년대 드라마에나 나올 법 한 그곳에서 우리의 첫 자취가 시작되었다. 침대와 책상 옷장들은 허름하기 짝이 없지만, 우리는 응답하라 1998과 같은 그 시절의 청춘과 낭만이 있었다. 졸업할 때까지 몇 번의 거처를 함께 옮겨 다니며 여전히 룸메이트로, 졸업 후에도 서로 살던 곳들을 바톤터치 하듯 이어받으며 이십 대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불안한 고용시대의 한가운데 있던 사회 초년생 시절엔 각자의 회사를 마치고, 고단함을 털고자 1호선 안양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곳은 우리가 각자 사는 지하철 끝과 끝의 중간지점이었다. 단골 즉석 떡볶이 집에 들러 매운맛 5단계를 시켜놓고선 억울함 회포의 끝은 누구인가를 배틀 하듯 이어가며 서러운 감정들은 매운맛에 날려버렸다. 부글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맵싹한 입안의 화기를 빼듯, 노래방으로 향해 2000년대의 애창곡들을 목청껏 소리 지르며 불러댔다.


그렇게 푸릇푸릇했던 우리의 청춘이 벌써 스무 해를 훌쩍 지나고 있다. 서로의 목소리, 몸짓, 웃음은 여전히 처음 부산역에서 만난 그날과 다를 바가 없다. 세월은 무심하듯 우리는 마흔을 넘겼고, 각자의 배우자와 딸이 생겼다.


그녀는 첫 출산으로 육아휴직 중이다. 누구에게나 소리 없이 찾아오는 산후 우울증이 찾아올세라 간간이 친구에게 통화 버튼 누르는 걸 잊지 않는다. 내가 겪었던 지독한 외로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와도 말할 수 없는 지난한 시간에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온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외딴곳에 홀로 있던 나를 찾아와 준 그 마음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출산 한 이후 가끔 예고 없이 친구 집을 찾아간다. 친구의 외로운 시간 이야기 동무라도 되어주고 싶었다. 우리가 닿으려면 경기 북부와 남부를 가로질러야 하니, 아이 등교와 동시에 출발해도 11시쯤이 되어서야 그녀의 집에 도착한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들고 반갑게 현관문을 두드린다. 문이 열리고 음악조차 없는 적막함, 커튼도 걷지 못한 채로 좁은 거실, 미처 치우지 못한 짐 속에 친구와 아기 둘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반가움 가득 담아 활짝 웃으며, 손에 든 테이크 아웃 커피를 흔들어 내민다. 사들고 온 간식거리를 펼쳐놓고 우리는 별 중요하지 않은 수다거리로 깔깔거리며 떠들어 댄다. 두 시간 남짓 엉덩이를 붙이고서야 아이가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이가 가장 늦게 하교하는 어느 날, 예쁜 수건 몇 장을 구입해 친구 집으로 나섰다. 좁았던 신혼시절의 복도식 아파트에서 제법 넓어진 계단식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깨끗해진 집에 한결 밝아진 친구의 표정과 사랑스러운 아기를 보고 오니, 무릇 안심이 된다. 이제 곧 복직을 앞둔 친구의 표정은 제법 밝다. 여전히 우리는 이십 대의 추억을 나누며, 마음은 이십 대의 언저리에서 지내고 있다. 결혼하고 서로 몇 번의 삶의 굴곡이 있을 때마다, 더 많이 분노해 주고 더 많이 억울해 주며 옆에 있는 것 마냥 수다를 떨었다. 떨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기꺼이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는 일이 없다.


인생에서 가장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 연락이 닿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함께 알고 지낸 날이 살아온 인생의 반을 넘어서고 있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되어도 핸드폰 속 저장된 그 이름 그대로 오래오래 곁에서 청춘을 함께 한 친구로 머물고 싶다.


“친구야 혹시 아니, 우리가 노년에 또 룸메이트로 만나게 될지?”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