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동백꽃과 편지

바람난 국수 1부

by SAY

온통 잿빛 세상에 붉게 물드는 동백꽃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이겨내며 단단하고 강인한 빛을 머금은 생명력이 아름답다. 그러나 가끔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순애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렁이고 있었다.

며칠 전의 가출로 인해 한바탕 소란이 일었었다. 중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했지만 순애 자신이 결정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행을 가는 것과는 달랐다. 잠시 낯선 도시에 머물며 낯선 음식을 먹고,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일과는 분명 다른 일이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 친구도 사귀고 좋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부일 것이다. 보통은 24시간, 365일. 자유롭지 못한 공간에서 정해진 프로그램을 하며 중수와 같은 배달 기사가 보내준 아침, 점심, 저녁을 먹어야 한다. 한 방에 여러 명이 공동생활을 해야 한다. 가족끼리 살아도 불편한데 타인과의 삶이라니. 막막했다. 그러나 중수를 생각하면 자신의 처지를 논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 기억이 흐릿해질지 알 수 없었고, 갑자기 귀신 들린 듯 밖으로 나갈 때는 통제조차 불가능했다.

순애는 부엌 싱크대에서 검은색 금전출납부를 꺼냈다. 200페이지가량의 두꺼운 가계부는 그녀가 오래도록 일기장처럼 써오던 거였다. 원래 목적대로 수입과 지출 목록을 적기도 했지만 보통은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곤 했다. 중수에 대해, 순애 자신에 대해, 이웃에 대해, 교회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녀의 금전출납부는 신문 못지않은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단 한 장도 찢은 적이 없었다. 첫 장부터 마지막장까지 1일 1페이지를 고집하며 수십 권을 이어왔다. 그런 소중한 금전출납부의 마지막 장을 과감하게 찢어냈다. 두꺼운 종이가 찢기는 느낌이 무겁다.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에 넣어두었던 접이식 책상을 꺼내 그 위에 종이와 펜을 올려두었다. ‘중수에게’라고 적었지만 더 이상 이어 쓸 수 없었다.

창밖을 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동백꽃이 보였다.

”봄보다 일찍 피는 동백이라도 있어 적적하지 않았는데, 요양원에도 그런 풍경이 있으려나. “

한참을 바라보던 순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5년 전, 국수가게를 처분했다. 권리금과 기타 비용과 대출금을 더해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마당이 작더라도 꽃과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집을 바랐는데 마침 오래된 동백꽃나무가 있는 이 집을 발견했다. 중심부에서 빗겨 난 동네라 한적했다. 비탈진 동네 초입이라 시내로 나가기에도 어렵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더 이상 이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바람은 여기까지다. 순애는 결심한 듯 편지를 써내려 갔다. 그리고 종이를 세로로 길게 접은 뒤에 다시 끝을 접고 또 끝을 접었다. 비닐봉지든 종이든 접어 버리던 습관대로 중수에게 보내는 편지도 쪽지 접기가 되어버렸다.

”아이참. 이거 습관이라는 게 무섭네. 중수에게만큼은 예쁜 편지지에 적어 봉투에 넣어줄걸. 마음만 앞섰네. 앞섰어. “

그렇지만 다시 쓸 용기는 나지 않았다. 순애는 잘 접힌 쪽지를 가지고 중수의 방에 들어가 서랍장 안에 넣어두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밤새 보일러를 돌렸지만 서늘함이 감돌았다. 새벽 2시를 알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잠이 깼다. 요양원 식사 배달을 하면서 몇 년째 이 시간에 일어나고 있지만 유독 겨울이 힘들다. 중수는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양말 서랍을 열었다. 순애가 가지런히 접어 넣어둔 양말 사이로 낯선 종이가 눈에 띄었다. 딱지 모양으로 접힌, 붉은 줄이 여러 가닥 그려진 종이였다. 중수는 순애가 금전출납부를 애지중지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순간 어떤 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잘 접힌 종이를 펼치니 익숙한 필체가 눈에 띄었다.


아들.
엄마가 아들에게 편지 쓰는 건 처음인가?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동백꽃이 피었더라고. 몇 해 전, 집을 구하면서 다른 것보다 마당에 꽃나무 여럿을 심을 수 있기를 바랐었잖아. 그런데 마침 겨울에는 동백꽃을 볼 수 있도록 집주인이 잘 가꿔놓은 마당이 달린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요즘 나는 네가 새벽 출근을 하고 일어나면 뭘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게 될 때가 있단다. 국수가게를 운영할 때에는 너보다 일찍 집을 나서기도 했고, 어떤 때는 함께 집을 나서기도 했는데 이제는 너를 보내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시간만 늘었지 뭐야. 그런데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긴 것 같은데 일기를 적으려고 보면 잊힌 시간이 점점 많아지더라고.

며칠 전에는 정말 하루 종일 아무런 기억이 없었지. 영자언니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면 다시는 동백꽃이 피는 아침을 맞이할 수 없었겠구나 싶더라.

중수야. 너의 고민이 무엇인지 내 모르지 않단다. 내게 기억이 좀 더 선명할 때에 함께 동백꽃을 감상할 새로운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네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려고 해.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엄마의 결정을 지지해 줄 수 있을까?



편지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중수의 눈물이었다. 홀로 중수를 키우느라 꽃이 피는지 지는지 모른 채 살아가던 순애였다. 뒤늦게 찾은 여유를 만끽하며 꽃과 나무를 가꾸며 즐겁게 보낼 노년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치매다. 순애의 작은 소원조차 지켜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무능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중수는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어두운 마당으로 내려가 동백꽃나무 앞으로 갔다. 이사한 그 해 겨울. 첫 봉오리를 터뜨린 동백꽃을 순애와 함께 감상했다. 시린 찬 바람에도 기죽지 않는 모습. 마치 순애의 인생을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로 종종 순애에게 안부를 물을 때나 사과하고 싶을 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중수는 꽃으로 마음을 전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는 카네이션을.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는 튤립을, 그리고 깊은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을 때는 한 해를 기다려 동백꽃을 전했다.

중수는 마당에서 따온 동백꽃 한 송이를 순애의 금전출납부 위에 조심스레 올려 둔 뒤, 출근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적막이 찾아온 뒤, 순애의 방문이 슬며시 열렸다. 그리고 순애는 싱크대로 가 중수가 남겨둔 마음을 조심스레 손 위에 올려 두었다. 꽃잎 위로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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