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둔살편
"우둔살이라는 게 거의 뻔하거든요. 국물을 내지도 못하는 부위고 산적 같은 거 하시겠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스타일로 준비해 봤어요." (흑수저)
"반건조 생선인 굴비에다 방아잎을 다져 고기반죽이랑 넣은 전 같은 게 있거든요. 우둔살은 퍽퍽해서 같이 드시면 조합이 엄청 좋거든요. 그걸 위주로 만들었습니다. 향도 좋아요 그게." (흑수저)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달려왔다 생각했는데 덜어냄의 미학을 몰랐다는 걸오늘 진짜 너무 크게 깨달았어요."
"색다른 뭔가를 찾아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많은 걸 있는 거에 또 하게 되면 메리트가 없는 것 같아서요. 새로운 걸 찾았어요. 새로 찾은 게 미소곰탕. 곰탕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물이 필요하잖아요, 우둔살에서는 국물이 나오질 않으니까. 그래서 무, 표고버섯, 다시마, 들기름을 넣고 달달달 볶다가 물을 첨부해 채소에서 우러나는 뽀얀 국물 준비를 먼저 하고 우둔살 피를 제거하고......" (백수저)
"올라오는 채소향을 느끼면서 국물을 드시고, 그 다음 미소를 한 번 드시고 국물하고 미소를 담아서 같이 세 번 드셔 보면 미소탕의 진가를 아실 겁니다. 아, 우둔살에도 이런 맛이 있었구나라는 걸."
"너무 맛있어 보이는데, 비주얼로만 보면"
"확실히 눈을 가리고 먹으니까 이게 없이(비쥬얼 없이) 맛으로만 느끼니까.."
요즘 프로그램 중 가장 화제는 단연 흑백요리사.
그 중 많이 회자되는 사진. 나 역시 가장 인상 깊게 본 에피소드 중 하나다.
늘 제도보다 구조, 체계와 제도를 잘 만들자 이전에 일과 인력을 최적화 하고 덜어내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을 해왔기에 더 와닿았던 지도.
두 사람은 요리 시작 전 관점부터 달랐다. 주제였던 우둔살은 기름기가 없어 퍽퍽하고 육회 외 달리 쓰임새가 많지도 않은 부위. 흑수저는 이 한계를 보완하는 데에 주력했다. 반면 백수저는 우둔살이 가진 고유의 맛을 살리면서 색다른 가치를 주는 데에 집중했고.
흑수저는 많은 재료를 동원했고 조리 과정 내내 움직임도 많았으며 다양한 재료를 조리하고 그 배치와 플레이팅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반면 백수저는 단촐하고 움직임도 적었으며 뭉근히 끓여냈다.
흑수저의 요리는 커다란 솥에 화려하게 담긴 반면 백수저의 요리는 작은 놋그릇에 담겼다.
이 에피소드에서 내가 도출한 핵심은 네 가지.
우린 조직에서 관계든 일이든 체계든 제도든 정교하고 이것저것 해야 할 것 천지를 전제로 시작할 때가 많다. 아무 것도 없다, 이제부턴 좀 체계를 잡아야겠다면서. 이건 무조건 +를 만드는 거다. 0을 가정하고 만들어간다에 중점을 두는 거. 하지만 선행되어야 하는 건 현재를 0점으로 두고 -인 걸 찾아 제거하는 거다. 그래야 미처 보지 못한 걸 걷어내고 정말 해야 할 걸 판별할 수 있다.
이번 주제는 우둔살. 주제는 곧 목적이고 보완하든 강화하든 우둔살 자체의 존재감을 잃으면 안 되는 거. 하지만 흑수저는 우둔살의 한계에 집중했고 다른 재료들을 부각하면서 정작 우둔살의 존재감을 약화시켰다. 우둔살을 주제로 하랬지 우둔살도 들어간 요리가 과제가 아니었음에도.
백수저는 달랐다. 우둔살이 주제이고 목적임을 놓치지 않았다. 우둔살의 본질을 살리면서도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더 돋보이게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젊고 패기 있는 흑수저였지만 우둔살은 이래, 우둔살로는 이게 다야, 다들 그래라는 고정관념을 깔고 시작했다. 반면 훨씬 오랜 기간, 더 많이 재료를 다뤄왔을 백수저는 뻔한 걸 다르게 해보자란 데에서 출발했다.
젊은이가 더 참신하게 톡톡 튈 거란 생각, 나이든 경험자가 자기 경험에 매몰될 거란 흔한 편견을 깨뜨린 것. 보통 새롭다 할 때엔 파격적인 걸 떠올리지만 백수저의 혁신은 의외이지만 노련했고 차분했다. 그게 진짜 경력자의 포스 아닐까.
아무리 합리적이고 실력 있는 심사자였다 해도 눈을 가린 채 맛보지 않았다면 시식 전 비쥬얼에서 일단 압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누군가를 채용하고 평가할 때, 고객에게 나를 어필할 때 주재료가 아닌 언저리에 주목하거나 강조하는 건 흔한 일. 소위 어느 학교 어떤 회사 출신, 저 같은 컨설턴트는 각종 보고서나 양식, 체계 같은 것들. 본질이 아닌 포장은 그렇게 스스로와 타인의 눈을 가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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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세월 대동소이한 HR 컨설팅이 한 끗 다를 수 있는 건 아이템 자체보다 타깃팅과 큐레이션일 지도 모른단 생각을 한다.
전에 수평이동으로 숙련자가 되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좀 더 잘 하는 걸 성장이고 실력이라 착각하면 곤란하단 글을 쓴 적 있다. 어느 이상의 경력이 차면 더는 지식과 경험을 '더 잘 쓰는' 숙련자가 아니라 그걸 토대로 새롭고 유연하게 '잘 응용하는' 게 전문가라고.
그래서 요즘 뻔할 수 있는 걸 어떻게 조합해 제공해야 한 끗을 만들 수 있는지. 분명 뻔한데 어, 뭔가 이 방식은 다른데 하는 걸 찾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다. 뻔한 바닥에서 한 끗 다르게 내 장르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