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씬이 잡호퍼를 부추기고 있지는 않은가?
첫 직업은 과외선생이었는데 이걸 10년 했다. 그중 어떤 그룹에 들어가 일한 게 2년, 마지막 2년은 내가 그룹을 꾸려 사업화 한 기간이었다. 애초에 목표가 돈을 벌어 빚을 갚고 '어엿한' 직장인으로 평범히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목표 달성 후 바로 이 일을 접고 나이 많고 사회 경력 없는 내가 월급을 받는 직장이라는 곳에 첫 취업했다. 이때 목표로 한 건 빨리 다른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 직장에서 9개월을 보냈다. 다음 레벨로 적당하다 생각했던 회사에 취업해 2년을 다닌 후 사업을 하겠다고 호기롭게 퇴사했다. 내 생각대로 되는 것 하나 없이 쓰라린 실패 경험만 남기고 그나마 가진 자금을 바닥까지 쏟아내는 데에 고작 1년이면 충분했다. 이후 모 대기업에 입사해 11년을 다녔고 언젠가 하고 싶다는 내 사업을 위해 작년 상반기, 스타트업에 합류했다.
인사담당자로 내 팀은 물론 회사 전반의 채용을 담당하며 초반엔 도무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길지도 않은 경력에 빼곡한 이력서 속 기업명들. 사내 다른 대기업 출신의 동료들과 "지원자 이력서가 하나같이 왜 이래?"라며 한숨 쉬곤 했다. 아무리 평생직장 개념 흐려진 지 오래고 실리콘밸리는 다 그래 한들 한 직장에서 최소 3년은 있다 가라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또한 1년 미만의 경력은 쓰지 않는 게 낫다라든가
이 기간은 몇 년이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고, 과거 혹은 대기업이나 그런 거라기보다는 뭔가를 제대로 배우고 익숙해져 자기 실력을 발휘해 뭔가를 하는 최소 기간이라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을 포함해 보통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임원 등으로 이어지는 진급제가 있는 대부분의 기업은 각 직급의 최소 승진연한에 차이가 있을 뿐 각 단계를 순차적으로 밟아간다. 주니어로 갈수록 짧게는 2년, 최소 3년 정도 되어야 배우는 기간을 넘어 조직, 사람, 시스템, 프로세스 등에 익숙해져 조직 자본을 뭘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고 본인의 일을 할 수 있다. 대기업 정도 되면 과장, 차장 정도 되어야 개별 Task를 리딩 할 기회도 생기고 그나마도 모두가 이런 기회를 갖지도 못한다. 그래서 최소 과/차장 이상 되었을 때 그래도 자기 업무에 한정된 작은 타스크라도 이끌어봤겠구나 한다. 이렇게 20년 정도 되면 부장쯤 달고 팀장 후보에도 오른다. (회사마다 대리, 과장급 팀장도 많으니 일반화시키진 말자)
다만 선배들이나 과거 조직에서 잦은 이직을 보는 시각엔 조직 로열티, 책임감 등에 좀 더 무게 중심이 있긴 하다. 최근에야 대기업도 경력사원 채용이 활발하다 보니 이직자들이 많이 섞여 있지만 부장 이상의 리더들은 신입으로 들어와 혹은 경력으로 입사했어도 꽤 오랜 기간을 한 직장에서 보낸 이들이 대부분이다. 리더, 회사에 철저히 얼라인 되어 목표 달성과 수명 업무에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온 이들 말이다. 이런 조직에서 주로 이런 조직에 다니는 다른 회사 사람들과 오랜 기간 부대껴 살아온 내게, 더구나 인사담당자로서 잦은 이직에 대한 시각은 썩 좋진 않을 수밖에.
때문에 스타트업에 와서 보는 거의 대부분의 이력서들이 처음엔 '지저분'해 보였다. 그리고 대체 1년 미만의 경력을 왜 죄다 쓰는지, 심지어 6개월 미만 경력은 진짜 왜 쓰는지도 이해 불가했다. 초기 스타트업에서 리드급을 중심으로 채용 노력을 하면서 그래도 리더는 진득한 사람을 뽑겠다며 열심히 찾아다녔지만 2년 이상 한 직장에 있던 사람을 찾는 건 또 왜 이리 힘든지. 그런 사람들은 co-founder급이거나 대기업에서 오거나 그 회사 붙박이거나 했기에 쉽게 움직이지도 않는 사람들. 답답한 기간이 흐르고 그다음부터는 타협을 했다. 경력에 3년 이상 다닌 회사가 한 번도 없으면 탈락, 최소한 10년 차 이상이라면 최근 이력의 회사는 2년 이상씩 다닌 사람에 한해 보자고. 그러나 이런 인재 역시 흔치는 않았다.
실무자나 주니어로 내려가면 정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데, 특히 최근 개발자 시장 호황과 맞물려 개발자는 몇 달 단위 이직이 국룰인가 싶을 정도.
이쯤 되면 대체 이 바닥은 어떤 곳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이해가 필요했다. 이젠 워낙 많은 스타트업이 존재하고 한 달에도 우수수 문을 닫거나 급여 체불이 일어나는 데다 들썩이게 만드는 주변의 '~하더라'가 많으니 이직이 많을 수밖에 없겠구나 한다. 엄청난 스펙이나 실력으로 큰 회사를 충분히 갈 수 있음에도 더 많은 걸 얻기 위해 스타트업에 뛰어든 인재들도 많지만 전체로 보면 극소수고 아닌 사람이 더 많은 중에 일단 입사해 후회하고 다음을 바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한다. 대기업에 오래 있었기에 더 크게 느끼는 '작은 회사'의 부담도 알 것 같다. 규모가 작은 곳에서 CEO부터 막내 직원까지 밀접하게 부대끼며 복닥이는 만큼 사람과의 궁합, 체계 부족, 시스템 미비 등 다른 제반 사항들이 훨씬 크게 와닿기에 더 빨리 좌절하거나 인내심을 유지시키기 어렵게 만들 수 있겠다고도 생각한다. 이러니 이직이 잦아지고, 이직이 잦아지니 힘들어도 의지하던 동료들이 줄줄이 나가면 나도 나갈 수밖에 없을지 모르겠다고도. 무엇보다 좋은 조건의 유혹이 널리고 널린 시장에서 남들이 다 그렇게 옮기는데 나 혼자 고고하게 회사에 대한 애정이니 동료에 대한 책임감이니, 혼란 속에서 더 성장하느니에 내 시간을 거는 게 바보 같을 수도 있다. 또 그렇다고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도 너무 많다.
여전히 최근 2~3개 직장은 리더급이라면 최소 2년, 더 양보해 최소 1년 반은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더구나 리더라면 더더욱. 리더는 개인 기여를 넘어 팀을 꾸리고 구조를 만들며 육성이나 제품, 인사적 사이클을 한바퀴 돌리는 경험까지 봐야 하므로. 리더도 연차나 경력, 리더십 기간(신임 팀장~임원까지)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생각하지만 1년 미만의 회사가 있다면 둘 중 하나가 아닐까란 편견이 있다. 모든 일은 한쪽 잘못만 있는 건 아니니 회사의 문제는 열외로 하고, 본인만 놓고 보면 '들어가니 달라서'라면 그걸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닌지, 회피한 건 아닌지.. 아니라면 '일단 괜찮아 들어갔지만 다른 더 좋은 조건이 오니' 떠났던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아무리 그래도 1년'이란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대기업과는 비교 안 되는 속도로 변화(혼란이 맞을 듯)가 일어나는 스타트업에서 1년은 최소 2년은 되는 것 같기도 해서. 그럼에도 최소 1년은 있어야 사업, 조직, 멤버, 시스템을 완전히 이해하고 성공이든 실패든 한 텀 돌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 이 1년의 기간은 경력의 최소 유효기간이라 생각한다.
이런 나도 근래에 1년 4개월 다닌 첫 스타트업을 퇴사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잘 지냈고 최소 3년~5년 정도 다닐 것 같다고 스스로도, 주변에서도 얘기했던 회사였다. 수술과 회복이라는 건강 문제가 크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나는 3~5년을 다녔을까 하면 솔직히 모르겠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마냥 좋을 수도, 마냥 나쁠 수만도 없다지만 애정이 큰 회사와 동료들이었다 해도 또 다른 이유로 최장 2년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때문에 내 이력서에 1년 3개월짜리 회사가 남았다는 것에 적잖이 좌절했다. 대단히 실패한 것 같고 내가 실눈 뜨고 보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진 것 같아서. 체력을 회복하며 이런 감정을 보듬고 복기해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그리고 스타트업씬에 대한 생각도 조언이나 정보들을 귀동냥하며 다듬고 있다. 이젠 많은 부분을 내려놓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영리함에 휩쓸리지 말자 한다.
마침 읽은 기사 한 편에 격히 공감하며,
어설픈 똑똑이, 이들을 전 직장 대표님은 영리한 사람이라며 질색하셨다.
얼마 전 북토크에서 나눈 스타트업 채용시장에 대한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하는 내용. 기웃거릴 기회가 많은 건 어설프게 똑똑한 사람들에겐 길게 보면 기회가 아니라 독일지도 모르겠다.
일독을 강추하는 기사.
※ 원문: 어설프게 똑똑한 사람들을 위한 제언 (아웃스탠딩)
* 관심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휴식 기간이 길어지면서 나 역시 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구직활동 없이 마냥 지내도 되는지 걱정도 된다. 퇴사 직후가 나에 대한 기업의 관심도는 가장 높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관심은 흐려질 수밖에 없다. 초반의 파격적인 조건의 제안들은 앞으론 못 받을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 한다. 그럼에도 어설픈 똑똑이가 되기 싫어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쉬려 노력하고 있다. 내게 내밀어지는 선택지의 수는 적어질지 몰라도 선택지의 질은 높아질 거라 믿는 건 순진한 생각이려는 지..
<본문 중>
똑똑하긴 한데 어딘가 결핍된 사람.
"양수는 아는 것도 많은 데다가 언변에 능했지만 (중략) 자신이 똑똑하다는 걸 끊임없이 과시했고 이를 위해선 주변 사람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기회가 눈에 보이고요.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의 단점 및 모순을 쉽게 파악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요.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제안이 들어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하기 때문에 지금 확~~~ 치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함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뚜렷한 성과물 없이 이직을 반복하다 인생의 아름다운 시기를 낭비하는 경우가 많고요. 자신과 조직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리어에 타격을 입고 남은 생을 세상 탓을 하다가 보내는 경우도 있죠. (중략) 저는 '어설픈 똑똑함'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비범과 평범 사이 애매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자신에게 딱 맞는 활동 공간을 찾기 어렵다는 뜻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을 다스리는 일, 무엇보다 욕심과 초조함을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중략)
조금 손해 보는 것 같더라도 우직하게 한 우물 파기, 겸손하기, (중략) 얕은수 쓰지 않기, 남 시선 너무 신경 쓰지 말기....
어설프게 똑똑한 사람이 조급하고 초조한 이유는 (중략) 가시적 실적에 대한 압박, 관심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인생은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최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날카로운 눈으로 보수적인 세상을 바라보면 자칫 사람이 냉소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