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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별 Oct 03. 2023

엔딩크레딧

세상에 없는 계절 #10

오래된 의문이었다.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이 주어졌던 게 아니라, 내가 그저 그 장면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게.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나조차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 했다. 내가 꼭 나에게 해주어야 했던 말은, 그래. 너는 지금 감당하기 어려운 걸 겪은 게 맞다. 라는 단 한 번의 긍정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인공인 영화에 나는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그 영화는 아주 서서히 끝이 났다.


영화가 끝장나버린 건, 주인공 둘이 더 이상 연기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막바지로 치달아 갈 때는 비급영화답게 어수선한 절정의 장면들을 몇 개 거치기도 했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고, 누구보다 먼저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래서 너무 쉽게 외면했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엔딩크레딧이 주는 특유의 우울감 속에 빠져 있었다.


이 영화는 항상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래서 상영되는 동안 눈도 많이 감았었다. 결말 따위는 애초에 궁금하지 않았고,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왔었던 비급 공포영화라고 할까. 매번 끝날 듯 새로 시작되는 이 기괴한 영화는 언제나 끝까지 보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하지만 지금은 객석을 지키고 앉아 있다.


엔딩크레딧, 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확인을 해야만 진짜로 영화가 끝났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엔딩크레딧에 덧붙고 덧붙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본다. 우리 가족의 삶 속에 스쳐 지나갔던 많은 조연들. 서로의 가족들, 서로의 친구들, 서로의 지인들. 그래도 나름 재밌게 본 장면들도 있긴 했다. 그 중 몇 번은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있는 내가 분명히 있었다.


특별하게도 이 영화의 주인공 부부는 조연인 두 자식이 헷갈릴 때마다 지도를 펼쳐 보이며 여러 갈래의 길을 알려주곤 했다. 그게 이 영화의 백미인 건 분명했다. 그들은 자식에게 헌신적이었고, 모든 것을 주려 했다. 자식에게만큼은 조연을 잘 이끌어 주는 베테랑 주연답게 굴었다.


나는 자식이라면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자식이기에 더 깊고 무한한 사랑을 먼저 줄 수도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걸,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은 어쩌면 어린 자식들이 온전히 다 자라서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 것은 아니었을까. 이 영화를 끝내고, 객석 너머의 출입구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엔딩크레딧을 넘겨 올려준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기다림이었구나.

그제야 터무니없이 긴 재생 시간이 납득되었다. 진작에 끝나버렸어야 하는 지지부진한 스토리가 가늘게 이어지고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진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세 번의 이혼 끝에 진짜 마지막 이혼을 했다.



아버지의 수술이 끝나고 어머니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인터넷이 안 된다며 몇 번이나 나를 호출했다. 아버지의 사정은 말하지 않았었다.


"엄마, 아버지 죽을병 걸렸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나는 오랜 간병으로 바닥난 체력만큼 어쩐지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평소 같지 않게 질문을 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아버지가 많이 아파요. 그래서 당분간 엄마가 불러도 잘 못 오니까 그렇게 아세요. 내가 너무 바쁘거든."


그렇게 말하자마자 곧 난리가 났다. 대체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니 애비 편만 드냐는 둥, 니 애비가 죽어도 나랑 아무 상관이 없다는 둥, 날선 말들만 쏟아내다가 기어코 엄마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였다. 어린 내가 부를 수 있는 어린 어머니인 [엄마].


한참을 서럽게 울던 엄마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다 내가 못나서 그렇다...."


엄마는 그렇게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다시는 엄마 앞에서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다시는 나의 욕심만으로 엄마를 구렁텅이에 빠뜨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암 투병기와 함께 이 영화의 엔딩크레딧은 드디어 끝이 났다.


이제 나는 객석에서 일어나 걸어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마지막까지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 영화는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아름다움은 이상함도 동시에 품고 있는 걸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생의 비밀을 알아채 버린 사람처럼 이제 나는 그만 어린 나를 놓아주려고 한다. 그 아이는 자라서 좋은 성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어떤 감정을 느껴도 그것은 온당한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더라도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이제 비는 그만 맞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그 아이와 이별을 하고 싶다. 그 아이가 쏟아지는 비에 온몸이 젖어가도록 서 있다면, 나는 기꺼이 우산을 씌워줄 것이다.


그 우산은 나만이 씌워줄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산을 쓰고 비를 맞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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