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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별 Oct 03. 2023

운명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세상에 없는 계절 #09

불행에 집중하는 법.

이런 걸 검색어로 쳐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가 딱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불행에 집중하기란 너무 쉬우니까.


반대로 말하면 행복에 집중하기란 그만큼 어렵다는 뜻도 된다. 불행은 어딘가 튀는 구석이 있지만, 행복은 대부분 스며들 듯 자연스러운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언어는 다양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문장으로 말한다. 불행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언어가 빈약하다. 언어가 빈약하니 표정도 빈약해진다.


아버지가 지내는 요양원은 서울 한복판에 있어, 가끔 차를 두고 지하철을 타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전철을 타고 내리며 마주치는 노인들의 얼굴에 어쩐지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이제 일과에서 가장 주요한 일은 늙어가는 일이라는 것, 그것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모두 이렇게 똑같은 걸까. 표정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만큼 동그란 원에 눈코입만 대충 얹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코입의 윤곽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고, 중심에서 처지고 있었다.


전철역을 걷다가 그런 노인과 눈이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철렁했다. 마주치는 노인의 얼굴마다 모두 아버지의 얼굴을 닮아 있어서 어쩐지 두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아버지의 늙음을 정성스럽게 받아들이고 옆에서 보아주는 것뿐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간밤에 본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의 일화를 떠올렸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잘 정돈되어 있다. 애정과 슬픔이 번잡하게 교차해도 언제나 정돈된 테두리 속에서 그 모든 사건은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움직인다. 그래서 아무리 아픈 경험도 정돈된 세계 속에서 언젠가는 힘을 잃고 가라앉는다. 즉, 얌전한 불행만이 일어난다. 왜 나는 그렇지 못했을까. 왜 우리 가족은 그렇지 못했을까.


오랜 시간 고민하며 얻은 해답은 첫째, 운명론이다.


어느 책에 나오는 것처럼, 지난 생에 나는 유의미한 잘못을 했거나 또는 이번 생에 압축 성장을 하기 위해 나의 의지로 이 가족을 택하여 태어났다. 그래서 이번 생의 모든 것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지난 생의 또다른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우리 가족의 양상은 특별한 것 없이 지나온 한 시대의 산물이다.


가족 구성원의 경험은 개인의 의지라기보다, 사회적인 행보에 가깝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1940년대에 태어난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약자인 여성, 어머니, 자녀에게 폭력을 쉽게 행사했다. 지독하게 가난했고 무엇보다 밥벌이가 가장 중요했다. 자식은 부모에게 재산이자, 노후 대책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몹시 아픈 부모님을 오랫동안 돌봐왔고, 그럼에도 차남이기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건 거의 없었다.  


한편, 약자인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남녀 불평등에서 비롯된 차별을 경험했고 제대로 꿈을 펼치지도 못하고 자라났다. 결혼해서도 고전적인 이데올로기에 갇힌 여성의 신분으로 남편과 대등하게 살지 못했다. 그래서 오직 자식에게만 매달렸고, 사랑했고, 또 이따금씩 할 수 있는 양껏 차갑게 굴었다.


오빠와 나는 1980년대에 태어났고, 다른 친구들이 20년 전후의 격차로 부모님과 세대 차이를 경험하며 힘들어할 때, 우리는 그 두 배의 40년 가까이의 세대 차이와 씨름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부모님과 불화했던 건, 시대적 보편성에 이러한 특수성까지 더해진 아주 당연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운명론 또는 시대적인 양상에 기대어 생각하다 보면, 나도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 또한 유구한 역사 안에 티끌 같은 부분이었다고 생각하면 내 감정도 정말 티끌 같은 게 된다.


아버지의 암 진단은 사실 갑작스럽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헤어진 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홀로 남은 아버지가 너무 외롭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암이 찾아왔다. 암을 치료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암이 있었기에 받을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암은 아버지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던 나를 아버지 앞으로 불러 모았고, 그게 어떤 과정이 됐든 아버지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암 투병 과정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장 약한 모습이 되기도 했고, 가장 밑바닥에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암 판정과 수술, 그 환자의 보호자가 되었을 때 가족이 응당 느껴야 할 감정은 지극한 걱정과 사랑이 먼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에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아버지를 지켜보며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감정을 계속해서 경험해야만 했다.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버린, 안전한 거리를 두고서야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던 과거의 어린 내가 다시 선명하게 나에게로 걸어 들어왔다. 아버지를 간병하는 내내,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어린 나를 앉혀놓고 대화하고 울고 화를 내고 다독여 주다가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다시금 해석해서 내 마음 창고에 집어넣어야만 숨을 쉬며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원 하나를 그려놓고 가운데를 푹 찌르는 상상을 해 본다.


모양으로 그리면 그것은 하트 기호다. 사랑에 실체하는 모양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혹시 어쩌면 이렇게 날카로운 무언가에 푹 찔린 모양은 아닐까. 그럼에도 두 쪽이 공평하게 서로의 어깨를 내어 맞대는 게 사랑은 아닐까.


그리고 아직은 거기까지 가지 못하는 다른 모양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은 모가 나서 조금만 건드려도 아프고, 어느 쪽은 완만한 형태여서 한없이 구부러지기도 하는 그런 울퉁불퉁한 사랑도 있을 것이다. 미움과 사랑, 애정과 분노, 비애와 기쁨, 후회와 자책이 모두 한데 흐드러지게 뒤섞인 내가 되어, 생의 마지막 시기에 힘겹게 몸부림치는 아버지를, 한 남자를 본다.


"나 이렇게 안 죽는다! 두고 봐라! 근데 오늘밤에 자다가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요동치는 마음을 그대로 내어보이는 전화를 했다.


사랑이란 게 인간이 진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라면, 슬픔이란 건 누구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자기만의 우물에 끝없이 침잠해, 때로는 그 우물 너머의 서로를 이따금 만날 수 있는 도구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다양한 하트 모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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