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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별 Oct 03. 2023

영혼의 집

세상에 없는 계절 #08

아버지는 수술 후 한 달이 지나자, 눈에 띄게 몸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아파서 성질을 못 펴던 때와 달리 본래의 모습대로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한 번은 내가 회사 중요한 미팅 자리에 있어 전화를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급히 전화했더니 아버지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댔다.


"왜 전화를 안 받냐고! 내가 죽어야지 원! 대체 내 밥을 어떻게 할 거냐고!"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주는 식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일반식을 신청했는데 그것이 정상적으로 처리되었는지 보호자인 내가 확인을 해주어야 하는데 연락이 안 되어서 그렇게 화를 낸 것이었다. 그래, 아버지는 이렇게 무턱대고 자기 입장만 고려하는 사람이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다웠다. 나는 아버지의 차도에 안도를 하며 웃어야 할지, 기분이 나빠야 할지 조금 헷갈렸다.


아버지는 아직 휠체어가 필요하긴 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걷는 연습을 했다. 요양원 수간호사가 따로 지도할 필요도 없이 자발적인 모습이었다. 요양원에 입원한 모든 환자 중에서 가장 요양원의 규칙을 잘 파악했고 어김없이 따랐다. 입버릇처럼 불평을 해대긴 했지만, 말과 달리 행동은 순종적이었다. 그야말로 일등 환자였다.


그러다 딱 한 번 수간호사 선생님과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

"밥이 싱거워 죽겠는데 간장을 다 뺏어가는 거야. 짜게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한바탕 했다."


아버지의 성미를 건드린 사람은 아버지가 요양원에 입원하던 날, 내 등을 두드려 주며 보호자가 먼저 힘을 내야 한다고 말해주었던 수간호사 선생님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나는 도리어 안심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한 번도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죽고 싶다느니, 자다가 가겠다거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는 것도 역설적으로 정말이지 살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병에 걸린 아버지는 예전보다 더 강하게 살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가진 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병환을 돌보는 일이 나에게 말할 수 없이 비애감을 주는 것은 확실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을 끊임없이 상상했고, 뜬금없이 불안해지기도 했다. 다만, 나는 그 슬픔의 실체를 좀 더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짠 내만 날 수도 있는 그 슬픔이란 게,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때때로 시큼달큼하기도 했으니까.


아버지가 젊은 시절 매우 아꼈던 물건 중 하나는 카메라였다. 지금의 나에게 어린 시절의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매주 가족들을 이끌고 여행을 떠났고, 여행 내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곤 했다. 아버지의 피사체는 오빠와 나, 그리고 엄마였다.


"내가 그래도 느이 엄마 진짜 사랑한다. 느이 엄마 아픈 덴 없니?"

두 분이 이혼 후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밥숟가락을 뜨다 말고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었다.


'아버지 때문에 많이 아팠잖아요.'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갑자기 칠 년 전 일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갑자기 입원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며칠이 지난 후였는데 어머니 연락을 받고 병원에 달려가 보니, 그녀의 오른쪽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구안와사라고 했다.


다행히 빨리 병원을 찾은 편이라서 치료를 받으면 호전될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하지만 완전히 예전 얼굴로 회복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는데 도무지 예전, 그러니까 일그러지기 전에 모든 것이 본래 자리에 있었을 오른쪽 얼굴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양쪽 얼굴이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다지만, 대체 내가 평생을 바라보았던 어머니의 오른쪽 얼굴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이상했다.


며칠 전 일은 더욱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몸을 밀치려 했고, 어머니가 대항하며 턱에 충격이 가해졌던 순간, 중간에서 버티던 내가 그만 발이 밟혀 엄지발톱이 미끄러져 빠져버렸던 순간들이. 그리고 거실 한복판에 식칼이 던져졌던가. 아니 식칼이 먼저였고, 엄지발톱이 나중이었나. 그날 나는 처음으로 112에 신고를 했었다.


그리고 1년 뒤,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지막 이혼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그렇게 매일 싸우고도, 시장에 가면 남성복 매장에 가서 남편의 와이셔츠부터 고르던 사람이었다. 그들만의 사랑과 분노, 애정과 슬픔은 자녀인 내가 이해할 수도, 이해할 필요도 없는 감정이었지만, 어렸던 나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둘의 감정을 두 눈으로 목격할 때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불안했다. 느닷없는 사랑과 끊임없는 불화에 내가 두 발을 딛고 선 땅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실체가 없는 영혼만이 집안을 둥둥 떠다니는 그런 영혼의 집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태어났을까? 정말로 무엇으로 태어난 건지 의문스러웠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본 엄마는 너무 자주 불행했다.

"네 애비 안 만났으면 더 이쁜 딸 낳았을 텐데."

그녀는 내 앞에서 표정 없는 얼굴로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아빠가 불안한 사람이었다면, 엄마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저런 부류의 말들을 많이 듣다 보면 나중에 최종적으로 갖게 되는 건 무력감이었다. 내가 두 사람으로 인해서 아무리 불행하다고 해도 나는 우리 부모님한테는 쨉도 안 됐다. 내가 과연 어디까지 불행해져야 한 번 정도 그들이 나를 들여다봐 줄까? 나는 그래서 가능한 나를 깊숙하게 파괴하고 싶었다. 그런 십 대 시절이었다.



어린 내가 서 있다. 어린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자꾸 의심스럽고, 내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은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비는 엄청나게 쏟아지고 나는 거기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 나는 힘이 있다.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우선 숨을 깊이 쉬어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내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줄 수 있다.


아버지를 돌보며 어린 시절의 나로 계속 돌아갔지만, 지금의 나를 꼭 붙잡고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광폭했던 말들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장면들이 불쑥불쑥 머릿속을 잠식해 버릴 때면 눈동자를 급히 좌우로 굴려보았다. 지금은 숨밭 고르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 숨에 밭이 있다면, 나는 그 밭을 가능한 한 고루고루 평탄하게 다질 것이다. 다른 누가 와서 쉽게 헤집을 수 없게 모든 슬픔과 기쁨을 다듬어 나만의 규칙과 방식으로 가지런히 정리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 과거와 감정이 한데 뒤섞여 헤집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지금처럼 우선 길고 긴 호흡을 할 것이다. 그러면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아버지의 식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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