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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별 Oct 03. 2023

세상에 없는 계절

세상에 없는 계절 #11

계절이 세 번 바뀌고 나서 아버지는 요양원을 퇴원하게 되었다.


나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요양원으로 차를 몰았다. 이제 새벽 공기가 제법 따뜻했다. 나는 오늘 아버지를 만나면, 어느 프랑스 영화에서 봤던 대화를 아버지와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화는 가족 영화였는데, 가족끼리 밥을 먹으면서 서로가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떤 계절을 좋아하세요?"


나는 나의 가족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무슨 계절을 좋아하는지 한 번도 궁금했던 적이 없었다. 이 질문을 주고받으며 그 영화는 신기하게도 끝이 났다.


이런 상상을 한 적 있다.

봄 - 여름 - 가을 - 겨울 사이에 하나씩의 계절이 더 있다면, 그 이름 뭐라고 붙일 수 있을까.


봄과 여름 중간에는 봄사이여름

여름과 가을의 중간에는 여름사이가을

가을과 겨울의 중간에는 가을사이겨울

겨울과 봄의 중간에는 겨울사이봄


우리 가족을 계절에 비유하면 가을사이겨울이 아니었을까?


대부분은 추웠지만 가끔 가을볕이 내리쬘 때도 있었던, 하지만 그 볕은 금세 자취를 감추곤 했던 가을사이겨울이었다. 가족의 기능은 진작에 상실했고,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어 원상복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분명 존재하지만 세상에 없는 계절이었다.


아버지가 요양원에서 퇴원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아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아버지는 나를 안아주었다.


아버지의 몸뚱이는 작고 초라했지만, 따뜻했다.


아버지를 간병하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손을 잡지 않았었다.


손바닥을 내어주면 내 마음을 온전히 다 들킬 것만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랑하기도 미워하기도 어려운, 암 환자가 된 아버지를 지켜보며 나는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망설이고, 모른 척하고, 다가서길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이 울었다.


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할 수도, 온전히 미워할 수도 없는 내가 견딜 수가 없었다.


정확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나 역시 누군가를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지 못했다는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 마음속 단 하나의 그림이 되지 못한 퍼즐 조각들이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나는 매일 밤 어린 나에게 사과하고, 어린 나와 화해하고 싸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나를 용서해야만 아버지 또한 용서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이미 산산이 조각나버렸다고 생각했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나는 다시 주워들었다.


나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는 사랑으로 태어났단다."


그게 설사 조금 그을린 사랑이었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사랑으로 태어난단다.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이 말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 말을 나는 나 자신에게 비로소 해 주었다.


그리고 휴지통 앞에 섰다.


오랜 간병 기간 동안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만년필을 꺼내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해서,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던 그 만년필이었다.


그게 만약 사랑이라면, 나는 그것이 그 어딘가가 아닌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만년필을 충분히 쓰다듬은 후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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