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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별 Oct 03. 2023

에필로그

세상에 없는 계절 #12


중학교 1학년 때, 하교 시간에 맞춰 아버지가 학교 정문 앞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막 두 번째 이혼 도장을 찍고 난 후였다. 오빠만 데리고 집을 나가 살던 아버지는 나를 예고 없이 종종 찾아왔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었다. 엄마 몰래 집 전화로 통화해서 약속을 정하고 무직정 약속 장소로 가서 기다려야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고, 그래서 몇 번은 정문에 서 있던 아버지를 모른 척하고 도망을 가기도 했다. 속된 말로 쪽이 팔리기도 했다.


그러다 한 번은 아버지가 날 발견하고 쫓아와서 학교 앞 빵집에 둘이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정말 미안하다. 나는 널 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단다. 아빠가 우리 딸 사랑하는 거 알지?"


나는 이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아빠가 사준 빵을 맛있게 먹고 친구들 이야기를 재잘대다가 엄마가 찾기 전에 집에 가야한다고 일어났다.


그런데 아빠와 헤어져 집으로 걸어오는데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아빠를 믿었고 사랑했지만,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가 되어 펑펑 울었다. 행복은 모르니까 두렵지만, 불행은 잘 알기에 익숙하다는 말이 있다. 불행이 습관이 되면 마치 오래 입은 잠옷처럼 편안해진다는 것이었다. 열네 살이었던 나는 이제 막 본격적인 불행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요양원에서 아버지 면회를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난 아버지에게 핀잔을 주었고, 시종일관 귀찮은 말투로 잔소리만 잔뜩 늘어놓고 왔다. 문득 눈물이 터져 나온 건,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도 나는 아버지를 완전히 사랑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 때문이었다. 아무리 애써봤자, 결국 나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고 그렇기에 나는 영영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영동대교를 지나는데 막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붉고도 푸른 빛을 뽐내는 하늘이 그 와중에 아름다웠다.


"참 예쁘다...."


꺽꺽 울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사랑은 한 가지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붉다 푸르다 확실히 말할 수 없이 색색으로 뒤섞여 찬란한 빛을 내는 저 석양처럼, 그게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건 사랑이었다.


다 끝난 것처럼 보여도 자그마한 불씨만으로도 다시 시작되는 게 바로 사랑이었다.


어제 끝이 나버린 사랑은 오늘 다시 시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받을 수 있는 최선의 모든 것을 받은 게 분명했고, 내가 받은 것만큼 돌려주지도 못했다. 그제야 서서히 눈물이 그치기 시작했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문구를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기란 불가능하다."

- 헤라클레이토스


나는 마치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을 운전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차를 몰아 다리를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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