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견딘 것들은 아름답다

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에게 건네는 말

by 윤슬작가

희한하게도 즐거웠던 순간은 금방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지..."라며 하나씩 더듬다 보면 보물 상자를 발견한 것처럼 "그때... 좋았지..."라는 말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 팽창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름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손님처럼 앉아있다가 조심스럽게 아는 척을 하면 그제서야 마중을 나온다. 고마운 순간, 즐거운 순간은 그런 것 같다. 어느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종종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잊게 되고,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것 같다. 행복은, 기쁨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반면 슬펐던 순간, 마음이 아팠던 기억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금세 떠오른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따라갈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 그때..."라는 짧은 탄식과 동시에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절대 그때의 감정이나 기분을 되살릴 수 없는데도, 마치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뭔가 따끔한 것에 찔린 것처럼 어떤 장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기억이라는 이름으로든, 아픔이라는 이름으로든, 언제든 달려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슬픔은, 아픔은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추억은 길지 않고, 나쁜 기억은 오래간다"라는 복잡한 문장이 어디에서 왔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큰 아이가 제법 자라 진로든, 친구 문제든 여러 방향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평행선을 달리다가 조금씩 접점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가끔 큰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의 행동이나 생활습관을 두고 엄마 대신 나서서 훈계하기도 한다.

"미루니까 그렇지!"

"왜 자꾸 화장실에 불 안 끄고 다녀?"

"맨날 게임만 해?"

"학원 숙제 미리, 미리 해야지!"


언젠가 큰 아이와 둘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쟤가 전에 뭐라고 했는지 너 모르지?"

"뭐라고 했는데?"

"엄마, 나는 누나처럼 안 할게,... 그랬는데..."

"나? 내가 뭐?"

"옛날에 너도 엄마 말 안 들었잖아... 그때 너 혼내고 나오면 엄마한테 와서 그랬거든. 나는 크면 안 그럴게요... 그랬거든..."

"쟤가?"

"그래!"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땐, 내가 좀 그랬지!"


딱히 부정하지 않는 아이. 참 할 말 없게 만든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1,2년 정도 큰 아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의 행동이나 모습에서 어떤 맥락이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마음대로 튀어 다니는 럭비공처럼 여기저기 날아올랐다. 럭비공이 튀는 방향으로 달려가다 보면 어느새 럭비공은 다른 곳으로 튀어 있었다. 럭비공이 튀는 곳마다 민감한 상황이 생겨났고 아이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속상해했던 기억이 난다. 애초에 좋은 시간, 행복한 기억을 만들겠다는 의도는 사라지고 혼자 우울감에 빠진 적이 많았다. 순간적으로 함께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생각에 빠졌고, 그러다가 눈이 마주친 아이와 나는 잠시 웃었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한 2년만 기다려봐..."

"뭐?"

"2년만 기다려보라고...."

"2년?"

"나도 괜찮아졌잖아... 그러니까 2년만 기다려봐... 2년 지나면 쟤도 나아질 거야... 나도 저 땐 저랬어"


"나도 저 땐 저랬어"라는 아이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좋은 추억은 길지 않고 나쁜 기억은 오래간다고 했던 복잡함이 아이의 말과 함께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힘들었던 기억과 좋았던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중력의 힘을 이긴 문장 하나가 허공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시간의 힘을 견딘 것들은 아름답다>


2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대화였다. 아이의 말대로 2년 후 이번 일에 대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가능성을 열어두고 바라볼 생각이다.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자연스러운 상태로 진행한다고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도 비슷할 것이다. 큰 아이가 자라는 과정이 그러했듯, 둘째의 과정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런 관점에서 2년 전의 시간도 자연스러운 상태였고, 동시에 지금이 시간도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한다. 억지로 끼워 맞추기보다는, 함수관계를 통해 방정식을 만들겠다고 덤벼들기보다는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내일을 열어놓을 생각이다. 내일이라는 공간이, 오늘이라는 시간이 준 선물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는 오롯이 내일에게 맡겨놓고 말이다.


by 기록디자이너 윤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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