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아야 한다"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부모님은 여전하시다. 학교를 졸업하고 제법 사회생활의 경험이 묻어있었을 때부터 부모님은 장소를 불문하고, 상황에 개의치 않고 한결같이 강조하셨다. 착하게 살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나중에 죽어서까지도 어떤 식으로든 빚을 떠안게 된다는. 거의 종교에 가까웠다. 왜 그렇게까지 반복적으로, 자주 언급하는지 따로 물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냥 '그러려니'라는 마음으로 절반쯤 넘겼고, 나머지는 나를 위해 굳이 착하지 않은 선택은 피했던 것 같다.
이십대에 들어서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착하게'라는 단어가 어리석고 순진하다는 말로 들려왔다. 따뜻하고 좋다는 느낌보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마음 한가운데를 차지하면서 혼란스러운 순간을 맞이했었다. 그러면서 수시로 물음에 빠져들었다.
'나는 착한 거야? 어리석은 거야?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반복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이제부터는 나도 착하게 살지 않겠어'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중에 죽어서도 빚을 떠안는다는 말이 무서웠다고 얘기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대전제는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추상적이고 모호한 경계 때문에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뭔가 기준이 필요해 보였다. 나를 살리는 차원에서든, 타인을 마주하는 태도에서든. 그러면서 마음을 뺏긴 단어가 '진정성'이다. '착함'이라는 막연함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진정성'이라는 형용사가 조금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하지만 진정성이라는 기준에도 불구하고 실재적인 느낌이 부족했다.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그 즈음에 달라이 라마를 만났던 것 같다.
"나의 종교는 친절입니다"
아마 달라이라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종교를 불교가 아닌 친절이라고 말하는 데에 대한 모습에 존경심이 생겨났고, 통찰력과 탁월함에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달아났다. 그때부터 많은 부분이 수월해졌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착함의 그림자, 나를 살리면서 동시에 타인을 마주하는 가장 실재적이며 현명한 태도는 '친절'이다. 그런 까닭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모스부호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만의 번역기를 돌린다.
'나는 오늘 나에게 친절했던가?'
'나는 오늘 나를 스친 그들에게 친절했던가?'
from. 기록 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