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그렇다. 사람은 오해받는 것을 싫어한다. 거기에 어쩔 수 없이 오해를 받았을 때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상황을 지적하며 관찰한 사실을 설명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은 내가 참는다'라는 말로 애써 말을 아끼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든 불편함이 발견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관찰한 사실을 설명하는 사람이 마치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려는 듯 연결고리를 필수적으로 찾아내는 느낌이라면 '오늘은 내가 참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서는 정말 참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말도 내뱉지 않지 않을까라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 생각의 연장에서 나를 되돌아보았다. 오해받는 것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어떠했으며, 나는 자잘한 설명을 곁들인 사람이었는지, 이번에는 내가 참는다는 말로 감정을 에둘러 덮으려고 했는지. 특별히 기억나는 사건은 없다. 희미해진 기억 덕분에 옅어진 감정이 미세 구름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모습이다. 그저 매 순간을 드라마 같은 상황이라고 여기면서 기적이나 음모론으로 부추겨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고 싶어 했었다는 몸짓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래서 현미경을 가지고 들여다보면서 이것저것 떼내면 완전히 다른 결말, 전혀 엉뚱한 시작점을 발견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분명한 사실은 나는 오해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오해받을 짓은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으려고 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상황 근처에는 아예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해를 받았다는 기분이 둘러싸이면 감정이 폭발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고, 한없이 부풀려진 감정이 나를 나락으로 몰고 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안이 필요했다. 그런 상황을 피할 방법은 없지만 그런 상황을 마주할 나만의 대안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말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별로 뚝 떨어지는 상황을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삶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엑스레이를 찍어 문제가 된 지점을 발견했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덮어둘 수 없었다. 나는 문장에 익숙한 뇌를 가졌고, 단 하나의 문장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찾아낸 문장이 있다. 어디까지나 나의 아이디어가 아님을 고백한다. 어디에서 건져올렸는지 모르겠다. 그저 나를 찾아왔고, 품었을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오해받으면 살아간다"
반복적인 패턴을 설명할 수 있는, 되풀이되는 과정에서도 연민의 시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명확하고 분명한 해법은 될 수 없지만, 적어도 변덕스러운 마음을 붙잡는 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절차적으로 완성한 과정은 아니지만 단순하면서도 믿음이 가는 표현이었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기적이나 음모론에 들이밀지 않고 나의 호흡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배경으로 내가 품은 것들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를 희망하면서, 동시에 어떤 입장도 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서 있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