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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클래식한 자기 계발서를 만나고 싶다면, 싯다르타

by 윤슬작가

브라만 계급의 싯다르타. 그에게 부족함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늘 갈증에 시달렸다. 현실의 삶에 안주하기보다 깨달은 존재가 되어 마음의 평온함을 얻을 수는 없을까. 결국 싯다르타는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친구 고빈다와 함께 자기 아버지, 자신이 살던 세계를 떠나 사마나의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물론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사마나가 되려는 브라만 아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곳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결심은 굳건했다. 결국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의 울타리에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의 출가를 허락한다.


그 후 싯다르타는 사마나들과 함께 생활하며 해탈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정좌하고 호흡하는 법에서부터 호흡을 하지 않는 법, 호흡을 멈추는 법까지 배웠으며 자신이 감각을 죽이고,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배운다. 하지만 자아를 벗어났다고 해도 이내 현실로 돌아왔고, 자신이 윤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윤회의 번뇌에 빠져있는 싯다르타에게 어느 날 새로운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는 고타마로, '깨달은 자'로 불리는데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고빈다와 싯다르타는 고타마를 만나기 위해 사마나 무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고타마는 행동과 말, 손짓, 몸짓 하나하나에서 가르침이 솟아났으며 진실로 존경심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고빈다는 고타마에게서 깨달음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고타마에 대한 높은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사상이나 가르침으로 배우기보다 스스로 깨치기를 바라고 싶어 하는 마음을 확인했고, 고타에게 높은 존경심을 표현한 채 고빈다를 두고 혼자만의 여행에 오른다.


싯다르타가 강을 건너기 위해 서 있다. 그는 깨달음을 위해 강을 건너려고 한다. 사상의 세계를 떠나 삶의 세계로 뛰어들기 직전이다. 이때 그런 싯다르타에게 뱃사공이 공짜로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저는 손님께 뱃삯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손님은 다음번에 제게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강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사마나 당신 또한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당신의 우정을 뱃삯으로 하겠습니다. 신들께 제사를 올릴 때면, 잊지 말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강을 건너온 싯다르타, 그는 '카말라'라는 기생을 만나게 된다.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싯다르타는 카말라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어떻게 하면 카말라와 가까이 지낼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달라고 얘기한다. 카말라는 똑똑한 청년 싯다르타를 상인 카마스바미를 소개해 주고, 글을 읽을 줄 알았던 싯다르타는 금세 여러 일을 맡게 된다. 이번에 다섯 번째로 읽으면서 <싯다르타>를 '클래식한 자기 계발서'라고 칭한 이유가 바로 이곳이다. 상인을 만난 싯다르타의 자기소개에서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공을 새삼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진 것도 없어 보이고,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싯다르타에게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상인이 질문한다. 그런 상인의 질문에 하나, 하나 또렷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싯다르타에게서 자기계발의 궁극적인 방향이 그려졌다.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배운 것,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사고할 수 있습니다. 나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나는 단식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게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컨대 단식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에 유익합니까?"

"주인이시여. 그것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면 단식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예컨대, 싯다르타가 단식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늘 안으로 어떤 일자리를 얻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아니면 다른 어디서라도 말입니다. 배고픔이 그를 그렇게 강요하도록 할 테니까요. 하지만 싯다르타는 조용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는 초조함을 모릅니다. 그는 궁핍을 모릅니다. 그는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릴지라도, 그 일을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상인은 현명한 싯다르타와 함께 장사를 시작하게 되고, 싯다르타는 성심을 다해 상인의 장사를 돕는다. 이내 싯다르타는 부자가 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카말라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현실 세계에서의 생활에 흠뻑 젖은 싯다르타는 애초에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조차 가물 해졌다. 그 즈음이었다. 카말라의 눈가에 주름을 발견하고,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싯다르타는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윤회의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으면서 자신이 지금 그 한가운데 있다는 발견은 싯다르타에게 비통함과 고통을 동시에 선사한다. 결국 싯다르타는 카말라와 상인을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카말라는 싯다르타가 이곳에 머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습이다.


상인과 카말라를 떠나 싯다르타가 당도한 곳은 숲속의 큰 강가였다. 배고픔에 허덕거리는 모습, 단식도, 생각도, 인내마저도 사라진,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것은 지니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비참함을 이기지 못해 강물에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싯다르타. 바로 그 순간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옴'. 브라만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말, 완성하는 것을 뜻하는 '옴'의 순간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깨달음은 순식간에 생겨났다. 자신은 절망을 체험해야 했고, 스스로 바보가 되어 자신의 길을 들여다봐야만 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방황, 번뇌, 고통이 강물 위에 펼쳐진다. 강물은 말하고 있었다. 과거와 미래는 없으며 오직 현재만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고. 자아는 죽었으며 새로운 싯다르타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기쁨에 젖은 싯다르타는 강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우연히 싯다르타는 수행 중이던 친구 고빈다를 만나게 된다. 화려한 복장, 부잣집 주인 같은 모습을 갖춘 채, 자신은 순례 중이라고 말하는 싯다르타와 수행자인 고빈다와의 재회. 복장이나 옷차림이 순례자 같지 않다는 고빈다의 말에 싯다르타가 대답한다.




"자네가 옳다고 생각하네, 고빈다. 하지만 오늘 자네는 그런 신을 신고, 그런 옷차림을 한 순례자를 본 것일세. 경애하는 친구여, 생각해 보게. 형상의 세상은 무상하다네. 우리의 의복은 무상하고, 극히 무상하다네!"



고빈다와 헤어진 후 싯다르타는 오래전에 자신을 강 건너편에 데려다주었던 뱃사공을 다시 찾아가게 되고, 함께 머물면서 배움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얘기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뱃사공은 싯다르타를 받아들였고, 뱃사공은 싯다르타에게 자신에게만 배울 것이 아니라 강에게서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준다.


한편 싯다르타가 떠난 후, 임신 사실을 몰랐던 카말라는 싯다르타의 아이를 출산한다. 그러던 중 곧 고타마가 입적할 거라는 소리에 그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선다. 물론 아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타마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신을 데리고 떠나는 어머니에 대해서도. 늙은 카말라는 걸음이 느렸고,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숲속에서 잠시 쉬게 되는데, 이때 카말라가 독사에게 물리게 된다. 다급해진 카말라와 아이는 근처에 있는 뱃사공 집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이때 싯다르타와 카말라가 재회하게 된다. 독에 물린 카말라는 싯다르타의 품 안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카말라가 남긴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마음을 먹은 싯다르타는 아이를 향해 지극한 정성, 끊임없는 인해와 기다림, 인내를 발휘한다. 하지만 성과는 좋지 못했다. 아이는 뱃사공과 싯다르타와의 생활을 지루하게 느꼈고, 싯다르타에게 반항을 했으며, 결국 자신이 살던 도성으로 도망친다.


아이에 대해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번뇌를 느끼는 싯다르타에게 뱃사공이 말한다. 그 아이는 경험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를 따르게 할 수 없을 거라고, 아이이 운명을 아버지가 대신 살아줄 수 없다고. 그 순간 싯다르타는 어떤 날의 장면을 떠올린다. 수행자의 삶을 선택하겠다는 자신의 뜻을 받아달라고 굳건하게 요청했던 어린 싯다르타와 그를 막아서고 싶어 했던 아버지를. 그 순간 싯다르타에게 또 한 번의 '옴'이 찾아온다.


싯다르타는 아이가 자신의 운명대로 살 수 있도록 보내주었으며, 자신의 운명과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다. 나아가 지식이 아닌 지혜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로 마음먹는다. 싯다르타의 옴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뱃사공은 숲속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고, 뱃사공과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싯다르타는 고빈다를 다시 만나게 된다. 여전히 구도자의 길에 서 있는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하고 질문한다.


"존경하는 분이여, 내게 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가르침을 따라 살고 있는지, 어떤 사상을 추구하고 있는지, 어떤 것이 행동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지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고빈다에게 싯다르타가 대답한다.




"나는 사상을 가져 보았네. 그리고 언제나 인식을 가져 보았네. 나는 가끔 한 시간이나 하루 동안 마치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생명을 느끼듯이 내 마음속에서 지식을 느끼곤 했네. 그것은 아주 많은 사상들이었기에 그것을 자네에게 전달하는 것이 나에게는 어려운 일 같네. 보게나, 고빈다. 이것이 내가 발견한 사항들 중의 하나라네.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 전달하려고 애써 봐도 지혜란 언제나 어리석은 생각으로만 들릴 뿐이라네... 농담이 아니네. 나는 내가 발견한 것을 말하는 뿐이네. 지금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그럴 수 없네. 지혜를 찾아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그것을 지니고 다닐 수 있고, 기적을 행할 수 있지만, 지혜를 말학 가르칠 수는 없네. 이것이 바로 내가 이미 청년이었을 때 이따금 예감했던 것이고, 나를 스승들로부터 떠나게 한 거라네. 나는 한 가지 사상을 발견하였네. 고빈다. 그 사상을 농담이나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여기겠지만, 그것은 최고의 사상이라네. 그 사상이란, '모든 진리의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다'라는 것이네. 말하자면 이렇네. 진리는 오직 일면적일 때만 언제나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고, 말로 포장할 수 있는 것이네"




매 순간이 완전히 찬란하다고 말하는 싯다르타, 한순간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말하는 싯다르타, 모든 진리의 반대도 진리라고 말하는 싯다르타, 절망, 기쁨, 사랑, 고통, 깨달음을 경험한 싯다르타는 돌에게도 가치를 부여한다. 돌은 곧 짐승이기도 하고, 신이기도 하고, 붓다이기도 하다는 싯다르타, '말'이 신비스러운 것은 맞지만, 자신은 도저히 '말'을 사랑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싯다르타, 그는 고빈다에게 자신이 깨달은 귀중한 결론을 전달한다.


"열반이라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네. 단지 열반이라는 낱말만이 있을 뿐이네"


싯다르타는 헤세의 종교적 해석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불안전함을 경험했던 어린 시절, 현재의 불안과 두려움, 부모와의 갈등에서 힘겨워했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탈출구를 찾고 싶어 했던 헤세는 동양의 신비주의를 경험할 기회를 가졌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완성한다. 그 작품이 <싯다르타>이다. 헤세는 삶은 완성이 아닌 과정이며, 마치 어떤 단계가 있는 것처럼 나아지는 것을 지양한다. 머무르고 안주하기보다는 직접 경험하고 부딪치고 조금씩 나아가는 것을 희망한다. 물론 그런 노력의 과정에서 방황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바라본다. 또한 삶은 이벤트가 아닌 일상이라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그런 헤세가 우리에게 던진 '옴'. 헤세가 생각하는 옴은 일상의 완성, 순간의 완성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지금을 마음껏 만끽하고, 운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온전히 경험하고 느끼기를 바라는 옴, 이보다 더 클래식한 자기 계발서는 없어 보인다.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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