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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작가 Sep 08. 2022

오래된 추석, 오늘의 추석


결혼 전, 명절은 큰집으로의 이동, 할아버지 댁으로 이동이었다. '공간의 이동'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추석이라고 해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을 챙겨야 한다거나 준비해야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내 몸을 잘 챙겨 엄마, 아빠를 따라 길을 나서면 그걸로 끝이었다. 어른들이 챙겨주는 용돈은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주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과 뛰어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었다. 시골에 있던 할아버지 댁에서는 낯선 풍경이 주는 설렘으로 뛰어다녔고, 그나마 시내에 있었던 외할아버지 댁에서는 몇 살 많은 이모가 선서하는 낯선 문화를 설레는 마음으로 따라다녔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명절은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동의 의미가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생겼고, 챙겨야 하는 것도 있었다. 그저 엄마, 아빠를 따라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놓친 것은 없는지 살펴, 두 아이의 짐을 챙겨 길을 나서야 했다. 용돈이라는 개념은 사라졌고, 오히려 고마움이든 반가움이든 마음을 담은 봉투를 준비해야 했고, 사촌들과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차례 음식을 위해 같은 자리에서 몇 시간 동안 앉아있어야 했다. 처음 결혼하고 맞이한 명절은 낯섦, 그 자체였다. 풍경과 문화는 낯설었고, 적응하는 일에 제법 많은 노력을 쏟아야 했다.


결혼 후, 십팔 년이 흘렀다. 많은 것이 익숙해졌다. 낯섦은 제법 줄어든 것 같다. 오늘 오후까지 수업을 마치고 집을 돌아와 장을 보고, 옷가지를 챙겨 내일 아침 두 아이와 함께 경주로 이동할 계획이다. 아이들이 조금 더 자란 까닭에 할 일이 챙겨야 할 것이 많이 줄어들었다. 나는 이동에 필요한 물건만 놓치지 않으면 되는 분위기이다. 학교, 학원으로 바빠진 두 아이는 명절에 만날 할아버지, 할머니, 사촌들과 보낼 시간에 마음이 설레는 모습이었다. 거기에 용돈이 생긴다는 소소한 즐거움이 제법 기분을 좋게 만드는 모습이다. 마치 오래전의 나를 보는 모습이다.


코로나로 인해 명절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사람도 늘었고, 숙소를 예약해 여행을 떠난다는 사람도 있다. 모습이 바뀌고,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도 명절은 명절인 것 같다. 반가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추석을 두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했다. 표현 그대로, 따듯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기를 희망해 본다. '가을의 한 가운데'가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from. 기록 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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