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모든 사람과 잘 지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어려운 얘기가 대화 주제로 올라왔다. 밤 12시를 훌쩍 넘긴 시각, 독서실에서 돌아온 아이와 과일을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각을 훨씬 넘겼지만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근래 자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인데, 아이가 나보다 훨씬 성숙한 느낌이다. 아니 훨씬 더 성숙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저 나이 때의 나와 비교를 해보면 완전히 다른 컬러를 지니고 있다. 나는 저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뿐더러, 결론이라는 것도 없었다. 원인은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결과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고나 할까. 생각을 했다고는 하지만 같은 자리를 맴돌기 일쑤였고, 땅을 파고 계속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 가장 중요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합리적이며, 이성적으로 생활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앞, 뒤가 꽉 막힌 상황에서 괴물에게 붙잡혀 온 공주가 되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누군가 말을 타고 나를 구해주러 오는 사람은 없는지 살피는 날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아이는 훨씬 선명하고 명료했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아이 역시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흔들거림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것을. 모두를 향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명 한 명의 눈빛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일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내가 그랬듯 누군가의 말에 걸려 넘어지고, 마음에 걸려 넘어질 일이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생각을 높게 평가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에 살펴보고, 관심을 유지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인과관계를 찾아보는 방식으로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이 대견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내가 나에 대해 섣부른 평가하고, 판단을 내린 후, 자괴감에 빠져드는 것을 방치했다면 적어도 아이는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자괴감을 선물하는 방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지 않으니, 분명 나보다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기분 좋은 얼굴로 일어나 아이는 샤워를 하러 갔다. 늦은 시각이라 조심해서 샤워를 하겠다면 자리에 일어서는 아이의 얼굴이 밝다. 샤워기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누웠는데 금방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1시 30분, 눈꺼풀이 스르르 밀려내려올 것 같은데, 의외로 희한하게 정신이 또렷했다. 아이와 함께 나눈 대화의 여운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와의 대화로 이어졌다. 실로 오랜만에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내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에 동의하니?”
“응. 동의해”
나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 결론을 얻게 된 것 같아?”
“음... 내가 노력한 것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었고, 의도한 것은 아닌데 오해를 받는 일도 생겼어. 처음에는 그 모든 것 하나하나를 설명하고, 나의 생각을 인정받으려고 했는데, 그 노력의 끝도 항상 좋은 건 아니었어. 그러면서 알게 되었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내가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도 거기에서 나온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거든.”
“요즘은 어때? 요즘은 어떤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 심플한 방식으로, 내게 오늘 하루를 잘 보내자. 작은 일이라도 정성을 다하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자. 이게 전부인 것 같아. 물론 결과는 내 몫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 관계도 비슷해. 찾아오는 사람이 생기면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고,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뜻이 다른 거라고 이해하기로 했어. 모두에게 사랑받겠다는 마음보다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어"
"어때? 편안한 요즘이야?
"음. 아주 평온해"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