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사람을 넘어 필요한 사람

by 윤슬작가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 <사람을 얻는 지혜> 첫 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글귀가 낯설지 않았다. 아니, 익숙했다. 익숙한 게 아니라 채집하여 서랍에 넣은 후 수시로 들춰보는 글귀인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내 안에 작은 균열을 일으켰던 그날이 떠올랐고, 아주 잠깐 스쳐갔던 질문도 떠올랐다.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질문이 의문으로 사라질뻔했는데,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한 느낌을 갖게 했으니 말이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살아가는 동안 자주 되뇌는 말이다. 직, 간접적으로 여러 방향에서 흘러 들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문장으로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사람은 친정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둘째가 태어나 첫돌이 되었을 때 덕담카드에 저 문장을 닮은 글을 적으셨다. 간결하고, 분명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아버지의 덕담카드에서 저 문장을 발견한 그날, 어떻게 된 일인지 꼭 나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지목했다기보다 나와 남동생, 자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아버지의 메시지 같았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갓 육십을 넘기셨을 때였다. 육십 년 가까이 살아내는 동안 아버지가 본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등 너머로 보고, 들은 것이 전부였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녀야 했다는 얘기를 무용담처럼 전해 들었다.


하지만 소중한 문장을 채집했다는 기쁨도 잠시,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주 잠깐이지만 엉뚱한 기분에 사로잡힌 것도 사실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찔린 것처럼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아프게 들리지? 의문이 생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기분이라며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한동안 완전히 기억에서 잊고 지냈는데, 몇 년 후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글을 읽으면서 아주 잠깐이지만, 그날의 아픔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상대방이 당신에게 고마워하기보다 기대하고 의지하게 만들어라. 기대는 오랫동안 기억되지만 감사의 마음은 이내 사라지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물로 목을 축이고 나면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아무리 맛있는 오렌지도 알맹이를 먹고 나면 껍질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듯,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예의도, 존경도 사라지게 된다."p.15


아버지는 가진 것 없이 하나씩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하는, 24시간을 48시간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고, 도움을 요청하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셨다. 금전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아버지는 도움을 뿌리치는 일이 없었다. 그 일로 엄마와 얼마나 다툼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다툼을 각오해야 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이 생겨났을 때의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저마다 사정이 있었고, 이유가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저 문장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도 되어 보았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상황에도 놓여봐야 했던 아버지의 인생을 압축해서 표현한 문장이었던 것이다. 수확의 기쁨과 아련한 마음이 동시에 찾아온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셈이다. 얼마 전부터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우연히 책장에서 발견하고 다시 읽고 있다.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여전히 깊고, 무겁게 다가온다. 그러더니 이내 오래전의 질문이 다시 찾아들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니?"


from. 기록디자이너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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