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유 Jan 14. 2023

새 탄생

굿바이 트라우마

1

우리 삶은 거짓말로 세워진 구조물입니다. 살려면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려면 거짓을 말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엘렌 식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이제 나는 나마저도 너무 잘 속이는 사람이 되어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을 때조차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2

나는 오랫동안 친형제를 죽이고 싶어 하는 아이였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하는 아이였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3

11살

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참이었고, 창이 복도로 나 있는 작은 방 안에 두 시간째 갇혀있다. 오빠가 방에서 나오면 죽여버린다고 말하고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왜 내가 방에서 나가지 못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기억하지도 못한다. 기억나는 건 방밖이 두려웠고 나는 그날 저녁을 굶었다는 것. 집은 밤늦도록 비어있었다.



4

요즘은 잘 사냐고 물었다 잘 사는게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요즘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다고 했다
-송승언, ‘지엽적인 삶' 『철과 오크』

병원을 가지 않은 채로 약 없이 일주일을 지냈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자고, 식은땀을 흘리며 깨고, 어지러워서 가끔 토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았다. 겨우 방문한 병원에서 의사는 약 부작용이 아니라고 했고 나는 그의 설명을 받아들인다. 해야 할 일을 미뤄두고 침대에 누워 비상약을 떠올리고. 그것이 내 최후의 변명 같은 것인가 생각한다.



5

이제 나는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를 획득한다. 가해자와 방관자. 그들은 외면한다.

동시에 정상가족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도 아직 남아있다. 이 마음은 나를 분열시킨다.



6

숲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는데 거기서 그 소리를 듣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나무 쓰러지는 소리는 난 것일까 아닐까?
-E.L.코닉스버그, 『침묵의 카드게임』

나무가 쓰러졌다면, 그래서 소리가 났다면 그건 난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일어난 일이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나의 기억은 유약하고 손쉽게 흩어진다. 내가 겪은 일은 일어났지만 점점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어간다.



7

친형제에게서 문자가 온다.

‘스스로의 문제를 왜 외부에서 원인을 찾으며 그걸 비난하려드나. 이겨내려면 인정해야 된다. 나 스스로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중요한 것들에 집중해야 된다. 여남은 일이야 신경 쓰지 마라. 혼자 견뎌내야 된다. 외부에서 위안을 찾지도 말고 답을 찾으려 하지도 말아라. 의사가 용하네 어쩌네 소리하지 말고 차라리 의료 자본주의를 탓하고 거기에 침뱉고 돌아서라. 그럴 생각 없다면 억지로 강요할 생각 추호도 없다. 그릇도 사이즈별로 용도가 다 있으니까. 동생아 우리 이제 30에 가깝다. 생각의 길이가 그거보단 길어야 안되겠나.”

나는 친형제의 번호를 차단한다.


다음 날, 다른 번호로 문자가 온다.

‘자기 인생 빵구나면 그거 다 가해자 잘못. 10년 아무 말 없다가 무슨 10주년 기념으로 터트렸냐? 어디 염병 비건같은 소리하고 다니는 지능이니까 그정도 판단도 안되냐? 자기객관화가 여전히 안되네. 너 시궁창이야. 외모나 능력이나 다 평균이하야. 말빨로 이길 자신 없으면 걍 아가리해. 왜 이제와서 지랄이냐고. 상대하기 싫었다고? 그럼 니가 묻어 놓은건데 왜 지랄이냐고. 제발 반박 좀 해봐. 너는 평생 피해자고 나는 평생 가해자고 부모는 평생 방관자냐? 역할 놀이 집어치우고 이제 니가 가해자라는 거 인정해라. 인정하기 싫지?’


나는 아주 천천히 답장을 쓴다.

‘만나서 좆같았고 다신 보지말자.’



8

아빠 번호로 전화가 온다. 친형제의 목소리가 들린다.

”씨발년아, 너 찢어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그래, 그래라.”

나는 전화를 끊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와 유서를 쓴다. 유서는 자주 갱신된다.



9

“네가 이해해. 원래 20대 남자애들은 다 그래. 그리고 가족이잖아.”

“네가 뭐 잘못한 거 없어? 아무 이유 없이 그랬다고 하는 건 네 주장인 거잖아.“

이 말들에 뭐라고 대답을 했더라. 곧바로 입을 닫았나. 진실은 이런 말로도 곧잘 불순해진다. 괜찮다고 생각은 하고, 온 마음은 크게 동요한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다.



10

내 불면엔 이유가 있다
너무 오래 뜬 눈으로 잠들어 있었다
너무 오래 침대 위에서
너무 오래 백지 위에서
우주를 유영하는 잿빛 맨드라미처럼
부채꼴 모양으로 팔다리를 휘저으며
추위를 만진 적이 있는 두 손으로
너무 오래 입을 틀어막고서
-이제니, ‘불면의 라이라' 『아마도 아프리카』

“그냥 잊어버려.”

사람들은 잊어버리라고 한다. 나는 잘 잊혀지지가 않는다고, 여전히 그 기억만은 생생해서 나를 뚫고 들어온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모두 잊은 체 한다. 그리고 나는 진짜로 잊는 사람이 된다.



11

“신은 견딜 수 있는 고통만을 준답니다”

그런 말은 너무 싫다. 죽은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견디고 있는 것도 그저 운이 조금 더 좋기 때문이다.



12

“필요하면 전화해."

“응"

“죽지마.”

“응"

“나 너 할머니된 거 보고싶어.”

“응"



13

12살

일기장은 아무래도 불안해서 솔직한 내용을 쓸 수가 없다. 아무도 찾아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공간을 찾아내고 나는 좁은 방안에 그보다 좁은 책상 밑에 온 몸을 구겨 넣어 쪼그리고 앉는다. 상체를 틀어 나무 책상 밑면에 글을 쓴다.

‘죽여버리고 싶다’

‘죽어버리고 싶다’



14

13살

사촌동생 라연이 갑자기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삼촌의 전 부인이 라연을 무작정 할머니 집에 놓고 가버렸다고 했다. 삼촌은 모든 가족의 미움을 받는 존재였고, 그 미움이 라연에게 향하는 걸 느낀다. 나는 왠지 모르게 라연을 지켜주고 싶다.

사람들은 라연을 방치하고 미움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라연을 몰래 데리고 나가서 놀이터에서 놀고, 목욕을 시켜주고 내 방에서 잠을 재운다. 우리는 손을 잡고 할머니 집에 밥을 먹으러 간다. 우리가 방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 오빠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고 라연이를 발로 찬다. 나는 온몸이 얼어붙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는다. 나에게도 폭력이 돌아올까봐 두렵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도 오빠는 라연의 의자를 계속 발로 찬다. 그것은 나에게 행해지던 폭력이기도 하다. 제 3자의 입장에서 폭력을 바라보자 숨이 막히고 손이 떨린다. 나는 라연이를 지켜줄 수 없는 거야. 죄책감과 무력감이 밀려온다.


매일매일 다짐을 한다. 오늘은 진짜로 더 잘해줘야지. 오늘은 정말로 가만있지 않아야지. 학교에서 돌아와 라연이를 찾는데 라연의 엄마가 갑자기 찾아와 데려가버렸다고 한다. 라연이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내게 편지를 남겼다.

‘언니 고마워.’

나는 편지를 쥐고 운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15

대학교 신입생 필수 과목에서 가정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시큰둥하다.

“정신적 폭력, 언어폭력 등 가정폭력의 종류는 다양하고 이것 또한 분명한 폭력입니다.”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저거 내 이야기인 것 같은데. 내가 당했던 게 가정폭력인가? 내가? 그럴 수가 있나? 친형제한테 내가 당했던 것도 가정폭력이라고 할 수 있나? 나는 혼란스러워지고 외면하고 싶어 진다. 그 생각은 오래 마음에 남고 규정되지 않은 채 부유한다.



16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 준단다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 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 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이운진, ‘슬픈 환생’ 『타로 카드를 그리를 밤』

잊고 싶어서 바쁘게 지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5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나는 불면과 악몽 중 무엇이 나은지 가늠하는 사람이 되어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울면서 밤마다 학교 운동장을 돈다. 개구리 울음소리, 조용하고 어두운 운동장, 희미하게 빛나는 가로등. 나는 두렵다.



17

스스로의 힘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미루고 미루던 병원을 찾아가서 상담을 하고 4시간이나 걸린 검사도 받는다. 의사는 조곤조곤 나의 상태에 대해 말을 하고 약을 처방해준다. 그리고 나는 조금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다.



18

2021년 12월 15일 유서

나는 죽어서 무엇이 될까? 내 육신이 분자로, 원자로 분해되고 땅으로 돌아가 이 지구를 이루다가 태양이 폭발하고 모든 요소가 다시 우주로 흩어지게 되고. 언젠가 나를 이루던 원자들이 다시 이리저리 뭉쳐서 새로운 거성이 되면, 그러다가 어쩌면 블랙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공전을 반복하는 행성이든 미지의 암흑물질이든 좋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계속 이 우주에 남아 있을 테고 새로운 분자구조를 가지고 더 멋진 여행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슬플 일이 아니다. 나는 더 자유롭게 우주를 유영할 것이다. 인간으로의 삶도 좋았다. 좋다는 것은 불행 속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



19

생은 고통이고 죽음만이 안식일지라도, 생을 향해 걸어나가는 일. 그 걸음을 흉내 내자 문득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저 기분이 되살아났다.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라도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을 두려워 않고.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트라우마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 카메라 앞에서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한다. 그것이 내가 가진 기억의 최선이므로. 이제 나는 기억을 넘어서 다음 장으로 간다.



20



21

그림자 아래 몇 번씩 네게 찾아오는 빛 있었지

새벽이면 잠깐 깨 네게 다가오는 바람 있었지

세상이 널 혼자 두지 않는 꿈

혼자되지 않는 꿈

그런 소망들까지 떠나보내지는 말아줘

되돌릴 수 없는 상처들 자라지 못한 어린 마음까지도

내 품에 안고 영원히

책상 아래 그리던 그땐 없던 것들

새기고 새겨진 고래들이 이젠 너를 업고

아픔들 있는 힘껏 푸우우

내뿜는 결마다 너의 새 탄생이 새 탄생이

<untitled> 작사・작곡・가창, 나나




굿바이 트라우마 3-1화. 너에게 이름을 줄게(1)

https://youtu.be/fnVrP3bRm7c


굿바이 트라우마 3-2화. 너에게 이름을 줄게(2)

https://youtu.be/UDYSqBZGpSw

매거진의 이전글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