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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Jan 28. 2022

한강 '소년이 온다'

5.18 민주화운동, 비극, 숭고한 마음

이 책을 읽으면 필히 영혼 어딘가가 부서질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처를 건너가야만 한다.


순진한 소년들이 있었고, 결의에 찬 청년들이 있었고, 단단하고 조용한 소녀들이 있었다. 그 맑은 영혼과 육체가 어떻게 으스러져갔는지, 찬찬히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그들이 겪은 일들의 일부에 일부도 안 되겠지만 무거움과 두려움을 온전히 느끼며 책을 넘겨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목도해야만 한다, 그들의 숭고한 마음을.


그들은 그날 밤, 계엄군이 도청으로 들어와 남아있는 사람 모두를 죽일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던 그날 밤, 기꺼이 그곳에 남았다. 그리고 모두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총이 그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으면서. 그러나 정작 군인들이 그들 눈앞에 총구를 겨누었을 때, 그들 중 누구도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을 죽이려는 사람 앞에서도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당신들은 나를 벌레처럼 으스러뜨리고 손쉽게 죽이려고 하더라도 나는 차마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는 마음. 나는 인간이 가진 숭고하고 고귀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지켜낸 삶이 숭고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비극적이다.

비극이란, 내 의사나 선택과는 무관하게 고통을 감내해야 할 때 더욱 짙어진다. 그들이 그 시대를 건너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들이 그곳의 시민이었던 것  모두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숭고한 선택의 대가로 부조리한 힘에 의해 생을 모조리 익사당했다. 


“꼭 죽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어, 형.”(p.126)


하지만 그들은 누구도 죽이지 못했다. 숭고한 마음을 가진 숭고한 사람들이었으므로. 

대신 스스로와 하루하루를 싸우고 있다. 아직도 살아있다는 치욕을 안고서. 그러니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아 주었으면. 그들의 마음이 숭고한 것이었다고, 다들 말해주기를. 그대들 삶이 숭고했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말해주기를. 으스러져간 모든 생을 지금껏 몰라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요청한다. 더 많은 이들이 기꺼이 이 슬픔과 고통을 감당해주기를. 이 책이 가진 이야기를 영혼에 새겨 주기를 요청한다. 그런다면 이야기는 단순히 “인생은 비극이다.”는 문장을 전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뒷 문장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 믿는다.




p.45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p.130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 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는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 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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