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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Oct 08. 2020

김애란 ‘바깥은 여름’

깊고, 짙은, 슬픔

                                                                                  

    「입동」은 우리가 얼마나 선택적으로 남의 슬픔에 공감하는지, 그 시간의 길이는 얼마나 짧고 그 후에 얼마나 서늘하게 돌아서는지, 그리고 남겨진 이들은 그 ‘꽃매’ 속에서 어떻게 앓는지 우리에게 찬찬히 보여준다. 그치만 남을 위해 오래도록 그들과 나란히 걸으며 슬픔을 앓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게 사실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더 슬픈 거 아닐까. 결국 자신의 슬픔은 자신만의 몫이라는 거. 누구든 마음 아파해주고 슬퍼해줄 수 있지만 그게 그 슬픔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는 거. 그리하여 결국은 자신의 슬픔은 자기에게만 절댓값이라는 거.

‘슬픔은 뼈저리게 외롭다.’, 다 아는 그 사실을 다시 활자로 확인하는 게 그렇게 슬펐다.  


    「침묵의 미래」는 더 짙은 외로움, 고독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어가 가늠하는 고독의 깊이, 그 독특한 시선을 오만하지만 뭔가 알 것 같아서 더 아프고 슬펐다. 혼자 남겨진 것이 결국에는 운이 나쁘게도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고, 그 외로움을 말할 수도, 들어줄 사람조차 없다는 고독. 고독해서 슬프고, 슬퍼서 외로운 날들을 결국 살아있는 한 견뎌내야만 한다는 것. 그건 어느 정도의 깊이일까,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그 심연 주위를 내내 서성거렸다.


    「노찬성과 에반」은 모든 단어와 모든 문장이 슬프게 읽혔다. 찬성이 에반을 사랑하는 마음, 그치만 동시에 아이다운 욕망을 거부하지 못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 작은 아이가 소박한 욕망을 거스르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돈을 써버렸다고 뭐라할 수는 없다. 그 아이는 그럴 나이니까. 그 작은 아이가 세상의 비참함을 너무 일찍 경험한 것 같아서 그 돈을 그렇게 써버린 자신을 책망할 것 같아서 아팠다. 그러니 꼭 안고서 나도 같이 울어주고 싶었다. 토닥토닥, 괜찮아. 너의 잘못이 아니야. 애썼어. 기특하네, 하고.


누구에게든 깊고 짙은 슬픔의 이야기가 필요한 때가 있다. 이 소설을 읽을 때의 내가 그러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풍경의 쓸모」)

그때의 나는 얼마간 어리둥절했다. 나는 워낙 천성이 느리게 흐르는 사람이라 내 정신은 아직 3월인데 어느샌가 8월에 와 있었다. 그 5개월의 시차를 견뎌내고 있었고 곁에는 이 책이 있었다. 이 책이 나에게 건네 준 슬픔 덕에 나는 내 슬픔을 돌볼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위해 마음 아파하며, 스스로를 애달파 할 수 있었다.

슬픔을 건너온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게 될까? 이제는 어디로 가고 싶을까?

발췌하고 싶은 문장이 너무너무 많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 모든 문장을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작가의 말>

(중략)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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