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감당 안돼서 쓰는 글
설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보고, 내 마음 구석에선 알 수 없는 뭉텅이가 점점 커졌다. 만난 적도 없는 그가 왜 이렇게 내 일상을 뒤흔들까. 감히 난 자주 설리와 날 동일시했다. (당사자의 마음을 당연히 다 알 순 없지만) 애쓰지 않아도 설리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많았다. 왜 그가 노브라로 다니기 시작했을지, 그에 따르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게 얼마나 피로할지, 그럼에도 다시 행동하는지. 앞에선 관종이라고 욕하면서 뒤에선 선정적인 문구를 검색하는 이중적인 대중에 얼마나 환멸이 났을지. 관종이라는 납작한 단어 안에 자기를 쑤셔 넣는 사람들이 얼마나 미웠을지. 그래서 그 삶이 얼마나 버거웠을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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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의 밤>을 볼 때면 전지적 설리 시점으로 스튜디오로 순간이동을 하곤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뱉고, 조금은 싸늘해진 분위기에 웃어넘기는 그가 보였다. 나도 자주 겪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간절하게 남들처럼 무던하고 싶지만, 어떤 말들이 날 침범할 때 그 맛이 너무 써서 뱉어낼 수 밖에 없는 그 감각. 사람들은 설리보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사네'라고 했지만, 내 눈엔 골라낸 말 같았다. 무표정으로 있기만해도 태도 논란이 이는 여자 아이돌의 세계에서 자기를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의 발화는 나로 살면서 세상에(방송에) 적응해보겠다는 도전같았다. 진심으로 용감해보였다. 그런 용기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을 이해해보고 싶고, 뭔가 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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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살아내기 위해 나를 미워하는 대신, 사람이나 세상을 미워했다. 그래서 설리가 진심으로 잘 살길 바랐다. 그가 80세 할머니가 돼서도 철없이 노는 모습을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 이제껏 그랬던 것 처럼 설리와 같이 크고 싶었다. 데뷔 때 열심히 춤추고, 한때 외모 컴플렉스로 괴로워하다가, 비슷한 시기에 GIRL 어쩌구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었다. 나도 맹목적으로 뭔가를 쫓다가, 나를 미워도 해보다가, 표현하기도 했다. 우린 서툴렀고, 어렸다. 그래서 또 사랑스러웠다. 앞으로도 다가올 궤적도 함께 밟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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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친구들은 쉽게 잠들지 못했고, 밤의 무게는 우릴 침묵하게 했다. 오늘 오후가 돼서야 우울해질까봐 얘기를 못했다고 침묵을 깼다. 이렇게까지 각자에게 타격감이 있을지 몰랐다고, 우리가 더 견고한 방패막일 수도 있지 않았겠냐고. 그에게 미안하다고. 그리고 이 우울을 혼자 감당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어찌됐든 말하자고. 부디 이제 더 좋은 세상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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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내 주변 분위기와 다르게 아침 신문스터디에선 온통 검찰개혁 얘기였다. 시신이 구급차에 타는 모습까지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면서, 대단하신 신문에 한 칸도 차지하지 못했다. 이 칸에 미리 설리 얘기를 진지하게 담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10년 전에도 지금도 여자 연예인들이 죽어나가는지에 대해,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시선에 대해, 그래서 슬퍼하고 있는 우리에 대해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