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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들렌 Nov 13. 2019

82년생 장종화에게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김지영의 이야기가 모든 여성에게 일반화될 수 없다. 82년생 장종화는 남자다움을 요구받은 삶을 살았다.’는 억울함을 토로하는 글을 봤다. 영화를 오독했다고 장종화 씨에게 친히 ‘영스플레인’을 좀 해주고 싶다. 장종화 씨가 원하는 남류 서사 영화도 추천할 예정이니 주목해주길.     


김지영이 모든 여성을 일괄적으로 대변할 필요가 없다. 캐릭터는 욕망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스카이캐슬> 예서는 서울의대에 가고 싶어 한다. 우리는 명문대에 가고 싶은 욕망에 공감했지, 예서와 조건이 비슷해서 이입한 게 아니다. 김지영은 묵묵히 참다가, 끝끝내 참다가 터트리는 욕망을 잘 드러내고 있다. 김지영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하는 주장은 한 여성이 모든 여성이라고 치부하는 습관과 닮았다. 한 여경의 실수를 모든 여경의 사퇴로 연결시키는 행태와 유사하다.       


안타깝게도 장종화가 오독한 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김지영이 되기도 하고, 김은영, 팀장, 엄마가 된다. 영화는 다양한 캐릭터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각각의 지점을 담아내고 있다. 경력 단절 여성, 결혼하지 않고 일하는 여성, 성취한 여성, 남자 형제를 위해 희생한 여성, 자기 얘기를 당당히 말하는 여성, 시댁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여성 등이 등장한다. 이 속에서 여성의 삶의 층위를 켜켜이 쌓아 올린다. 영화는 여러 가지 군상을 보여주면서 일반화라는 비판을 비껴간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몰카, 경력 단절, 어두운 밤길 등의 장면에서 보편적인 경험을 모은다.      


‘82년생이 모두가 겪은 건 아니다’는 주장은 오만하다. 여성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고 일률적이지 않다. 우리 엄마는 사이다 캐릭터로 나오는 김은영에 가깝지만, 김지영의 시어머니가 겪을 법한 명절을 매년 겪었다. 내 친구의 어머니는 김지영과 비슷했지만, 정대현 같은 아버지는 없었다. 여성의 삶은 세대로 대변될 수 없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높은 지위를 가져도,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버텨야 할 수도 있다. 여성의 차별은 경제성장률에 따라서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처럼 정량적인 게 아니다. ‘이 세대에는 겪지 않았을 차별’이라는 말이 그래서 교만하다. 청년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세대를 퉁쳐서 사회를 이해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에서 ‘남자다움’을 말하라는 건 정말 얄팍한 반론이다. <기생충>을 보면서 왜 중산층으로 등장하는 박서준의 이야기를 담지 않냐고 물었을까. 영화는 영리하게 남자들의 반론에 재반박하고 있다. 정대현은 보기 드문 괜찮은 남자다. 육아휴직을 자처하고, 아내를 위해 정신과 상담을 알아보고, 육아도 많이 도와(?) 준다. 그가 별로인 남자로 그려졌다면 분명 ‘왜 남자를 나쁘게만 그리냐’는 반론을 받았을 거다. 영화 <벌새>는 충분한 개연성을 줬음에도 폭력적인 아버지와 오빠를 그렸다는 이유로, 이 질문을 숱하게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감독은 정대현을 버리지 않고, 지영의 최대 조력자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평범한 부분도 있다. 육아를 ‘도와준다’고 말하거나, 야한 사진을 돌려보는 동료를 비난하지만 내버려 둔다.) 혹시 정대현의 서사가 충분히 대변되지 않았다고 느끼는가? 그게 90% 이상의 영화에서 여성이 느끼는 감정이다.      


장종화 씨가 남자다움에 의문을 갖게 하는 영화를 보고 싶다면 <파수꾼>을 강력 추천한다. 2011년 신인감독상을 휩쓴 훌륭한 영화다. 남고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폭력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심리를 잘 담아냈다. 이제훈의 연기력도 일품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여학생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자퇴하고, 조리돌림 당하는 삶에 주목하기를 기대해본다. 남녀가 평등하려면 서로에 대한 입장 이해가 필요하니까. 부디 ‘감독의 의도’를 사려 깊게 이해하지 말길 바란다. 장종화 씨가 ‘모든’ 청년을 대변한다면 그래야 한다.      


김지영은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빙의’한다. 착하고 친절한 둘째 딸이 내는 목소리는 더 큰 울림을 준다. 지영은 참다 참다 자신의 인생을 지켜줬던 여성을 불러낸다. 영화 속에서 지영은 여성을 호명하고, 영화 밖에서 감독은 <82년생 김지영>을 불러냈다. 이 영화의 개봉은 김지영의 빙의다. 그동안 영화계에서 참았던 목소리가 찢어지듯 나왔다. 카메라는 가사노동이나 육아를 성실하게 담아내고, 감독은 여성의 감정을 주된 서사로 이끌어나간다. 리베카 솔닛은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이렇게 이름의 의미를 정리한다. “이야기를 바꾸는 일, 이름을 바꾸는 일, 새 이름이나 용어나 표현을 지어내고 퍼뜨리는 일은 세상을 바꾸려 할 때 핵심적인 작업이다.” 아직도 더 많은 여성의 이름은 불려야 한다. 2018년 상업영화 77편 중 핵심 창작 영역에 여성 감독이 참여한 영화 편수는 13%에 불과하다. 정말로 82년생 장종화가 필요한가. 누가 그 영화를 만들지 말라고 했나.     


      

PS. 김도영 감독은 인터뷰에서 조남주 작가의 말을 인용했다. “오이가 아무리 싱싱해도 식초에 담기면 피클이 되죠. 우리가 어떤 문화·관습·시선 안에 있는지를 봐야 해요. 영화 속 인물들도 모나고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식초에 절었을 뿐이에요. 책 한 권,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꾸진 못해도 식초를 묽게 만드는 물 한 방울이라도 됐으면 해요. 언젠가 <82년생 김지영>이 사람들이 1도 공감하지 못하는, 전래동화 같은 얘기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봐도 <82년생 김지영>은 절여있는 우리 일상을 같이 반성해보자고 만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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