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대천으로 놀러 갔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파도가 크게 치는 날이었고, 날이 조금 흐렸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가족들도 오랜만의 바다에 신이 나서 뛰어 들어갔고, 물을 싫어하던 나는 오는 파도에 발을 맡기며 파도를 바라볼 뿐이었다.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파도를 바라보며 알게 된 것은 파도가 친다는 표현은 지극히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파도라는 것이다. 파도는 치는 것이 아니라 오가는 것이었다. 파도는 내 발을 치고서는 항상 산산이 부서져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니까, 파도는 나를 치고서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어딘가에 남아 다시 돌아오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파도를 바라보면서, 잊히지 않는 기억들을 생각하고는 한다. 나의 어릴 적 첫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이다. 그때 즈음에 부모님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부부싸움이 잦았고, 한참 뉴스에서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할 때였다.
나는 우연히 잠에서 깬 새벽에 거실에 엄마와 아빠와 형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베개를 들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정확히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런 행동을 한 내가 기억이 남을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우리 집이 그렇게 큰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살고 있다. 반지하에 살았을 때도 배울 점이 있었고, 5층에 사는 지금도 배울 것이 있다. 그날의 나는 가족 모두를 죽이고 자기 자신조차도 죽이려고 했던 걸까? 다른 기억들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고 없는데
유독 이 기억만 생생히 남아 다시 내게 되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에게는 어린 시절의 기억도 거의 없고, 미래의 기억은 더더욱 없으므로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현재는 과거의 내가 무언가로부터 부딪쳐 산산이 부서진 다음 흩어져 가 현재의 내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현재의 나를 보며 과거의 나에게 고맙다며 인사를 건네고는 한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맙고, 그 와중에 덜 막살아줘서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