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이글 56회_이글_악마_170121
책상은 하나의 우주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치워도 정리가 되지 않는데, 그게 또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좀 심했다. 아무래도 내 우주에는 블랙홀만 있는 것 같다.
벽돌처럼 쌓여있는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팟캐스트에서 하는 책 소개를 듣고 서점까지 가서 사 들고 나왔던 책인데, 집에 와서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었다. 딱히 뭔가를 얻으려는 건 아니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오늘은 아닌가 보다.
다른 쪽에서 관심도 못 받고 구겨져 있는 영수증들을 하나씩 펴봤다. 누가 그랬다. 당신의 가계부를 보여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당신이 읽은 책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얘기보다 현실감이 있는 말이다. 그 말에 따르자면 당신이 읽은 책이 아니라 당신이 산 책이 당신을 말해준다고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우리의 취향은 이제 소비로 표현된다. 아무래도 좋은 취향의 취미를 하나쯤 만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소비하는 게 아니라 생산하는 것에 대한 취미. 그런 취미를 만들려면, 뭘 먼저 사야 할까.
가로세로 1미터가 조금 넘을 책상 하나 정리하는 게 참 끝이 없다. 정리라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회의감이 든다. 책상 위의 물건마다 제자리를 정해주고 그 자리에 항상 있게 해주는 것이 정리일까?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리는 것이 정리일까? 필요함과 불필요함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지금 당장은 필요 없지만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들은 어디쯤에 위치해야 하는 걸까?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치워야 한다면, 이 자리가 과연 무엇이길래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다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바로 사용할 물건이라는 조건이 붙으면 많은 것들이 쓸모없어진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쓸모가 있는 사람이려나. 여긴 내 책상이니 나도 어느 정도 쓸모가 있겠지.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곳에서는 쓸모가 없을 테고.
오만가지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철학과에 갈 걸 그랬나 보다.
책상 위의 블랙홀이 태양계 정도로 정리가 됐다. 시간과 몸을 쓰면 대부분의 일은 해결이 된다. 노력은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가져다주고.
이제 새벽 3시.
시험까지 6시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