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섬 Jul 02. 2019

거울

이책이글 94회_이글_소리가 점점 커졌다_190321

다른 사람의 충고가 별로 쓸모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쨌거나 쓸모없는 충고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하는 말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쓸모있는 충고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듣는 쪽에서 그 충고를 마음에 새기거나

행동을 바꾸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충고는 쓸모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굳이 이렇게 충고가 쓸모없다는 쓸모없는 충고를 길게 하는 이유는

다 그럴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인간으로 가득 찬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고 있었다.

대개의 퇴근길은 피곤하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힘들었다.

아무튼 내 컨디션이 바닥이었던 건 분명하다.

앉지도 기대지도 못하는, 관보다 작은 공간에서 한참을 오다가 내릴 역에 도착했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어떤 남자가 안에 있는 사람들을 헤치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인파에 밀려 나도 휘청거릴때 사람들을 가르며 들어오던 그 남자가 내 옆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귀에 속삭였다.


“내린 다음에 타야지. 이 새끼야.”


뒤따라 타는 사람들에 밀린 그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고

나는 내가 한 말에 놀라느라 문이 닫히고 있는데도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욕이라니. 그것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속이 울렁거렸다. 호흡이 가빠지고 귀에 들리기 시작한 내 심장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전동차의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하자 어느새 뒤돌아선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새끼야? 방금 내 귀에 속삭인 놈 나와봐! 안 나와? 그렇게 당당하면 나와서 말해보라고!”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돌아보지는 못하고

문의 유리에 비친 그의 얼굴을 슬쩍 훔쳐봤다.


“나오라고!”


위협적인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묘하게 긴장감이 없는 얼굴이었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허공에 대고 독백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내린 줄 아는구나.

그런데 왜 소리를 지르지?

아, 내가 자기에게 한 말을 다른 사람들도 들었다고 생각하는구나.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인간 참 별거 없구나 싶었다.

바닥을 보며 애써 웃음을 참다 보니 갑자기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문 유리에 비친, 슬쩍 본 그의 모습이 그인지 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 20화 자연스럽게, 가볍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