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륜 Aug 23. 2016

서랍에서 유물을 발굴하다

인생의 한 페이지를 다시 만나는 기분

생각도 못한 순간에, 생각도 못한 물건들로 추억을 떠올릴 때가 있다.

분명 버리지 않았다는건 알지만 그렇다고 굳이 찾으려들지도 않았던 물건들을

반 강제로 꺼내어보고나니 그 때의 기억들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이래서 물건은 때론 기록보다 힘이 크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중국에서 유학하던 2010년은 아직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기다.

당연히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순수하게 전화와 문자만 되는 저 싸구려 노키아폰으로 나는 일년을 버텼다.

지금 유학하는 친구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원시적으로, 말도안되는 중국어를 써가며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으로 유학와있던 학교 동기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나마도 비용을 미리 충전해서 쓰는 핸드폰이라, 요금이 떨어지면 한동안 안녕이었다. "뚜이부치, 닌 다더 띠엔화 정짜이 팅지러(죄송합니다, 지금 거신 핸드폰은 현재 이용할 수 없는 핸드폰입니다)" 라는 안내음성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가장 맘에들어했던, 고등학생때 쓰던 폴더폰과 유학했던 시기에도 굳이굳이 들고갔던 한국 핸드폰은 아직 서랍에 남아있었다. 이제는 충전핀 규격도 바뀌어 다시 켜보지도 못할텐데 말이다. 저 안에 들어있던 내 추억들, 화질 나쁜 사진들, 16화음 벨소리 모음을 다시 열어볼 수가 있을까.

고등학생 때, 나는 학원을 거의 안다녔다.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왔다갔다하기 귀찮았다. 사람들 신경쓰는 것도 힘들었고, 교복입고 학원가기도 싫었다(언젠가 한번 짝사랑하던 남학생과 같은 학원에 다닌적이 있었는데, 그친구 덕분에 한 2~3개월 다녔던 것 같다. 그게 가장 긴 학원수강 기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강을 애용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인터넷만 켜면 딴짓하는건 변함이 없었는데, PMP가 등장한 이후에 많은게 바뀌었다. 인강을 한꺼번에 기기에 넣어서 돌려볼 수 있었던 이 PMP는 인강으로 수능준비한 나에게 정말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고, 몰래몰래 드라마까지 넣어서 보곤 했다.


PMP만 보면, 독서실에 앉아서 하루 목표량 몇개를 정해놓고 1.3배속으로 돌려듣던 때가 생각난다. 선생님들이 가끔 강의중에 웃긴 얘기를 하며 혼자 마음속으로 키득거리곤 했다. 그렇다고 아주 열심히 공부를 하고 아주 좋은 대학에 간건 아니지만, 덕분에 마냥 외롭지는 않은 수험생활이었다.

고등학교 방송부 후배들이 선물해준 수능 백일 반지. 

사실 고등학생 때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시간적이나 금전적인 부담도 물론 있었지만 그때 좁디좁은 방송실에서 동고동락하며 만난 좋은 언니동생들 덕분에, 여고에서는 만나기 힘들다는 '선후배'들을 아직까지도 만나고 있다. 수능 백일 반지를 낀다고 절대반지마냥 수능을 잘 보는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3년 방송부 생활에 대한 일종의 보람과 뿌듯함을 손에 걸고 남은 수능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학생활 가장 열정을 바쳤던 연합동아리 OVAL.

한중일 대학생들이 모여 자체적인 운영조직을 만들고, 연 1회 참가자를 모집해 비즈니스 대회를 개최한다.

서울과 북경, 도쿄를 돌아가면서 대회가 열리는데 나는 2008년 2학기에 동아리에 들어가, 2009년 도쿄대회를 치르고 2010년 베이징대회까지 도왔다. 보통 스태프 임기가 1년6개월인데, 나는 OB가 되고나서도 중국에 있다는 이유로 베이징대회까지 함께했다.


중국과 일본까지 함께 있는 연합동아리이다보니 기본적인 영어야 다들 조금씩 했지만, 자기가 잘하는 언어권에 아무래도 마음을 주게 된다. 일어를 잘하던 친구는 지금도 그때의 OVAL JAPAN 친구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고, 나는 당시에 몇 없던(그때만해도 중국어를 하는 사람이 아주드물었다) 중국어 가능자였기에 OVAL CHINA친구들과 어울렸다. 아주 가까이 지낸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도 간간히 연락하고, 한국에 놀러오거나 내가 중국을 갈 때 만나곤 한다.


스무살때 연합동아리에 들어가,
언니오빠들과 함께 일을 꾸려나가는건 쉬운건 아니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마냥 예쁨받고 귀염받는 내 친구들과는 달리 부회장 직책을 맡고있어서 더 부담이 컸다. 지금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뭘 그렇게 잘하려고 애썼을까, 뭘 그렇게 아등바등 조바심을 냈을까-


이 2009년 도쿄대회 기념품을 보고나니, 그때의 아쉬움도 떠오르고 마냥 열정만 있던 내 서툰 모습도 떠오르고, 도쿄에서 신종플루때문에 다들 긴장했던 날들도 떠오른다. 그립지만 내 부끄러운 모습때문에 다시 돌아가고싶지는 않은-



이번에 방 정리를 하면서 내 다짐은 '최대한 많이 버리자' 였다.

책도 많이 버리고, 이고지고 살았던 공연표와 카탈로그도 다 버렸다. 조금 아쉽더라도 다 버려버렸다. 그래야 새 방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 사진에 담긴 물건들은 차마 못버렸다. 아직 다 버리기엔 내가 가지고있는 추억이 너무 커서, 그리고 언젠가 다시 내가 또 한번 이것들을 발견한다면 그땐 더 큰 추억보따리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인생의 한페이지를 기억할 수 있는 물건들이 있다는 건 꽤 의미있는 일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밤 도심 옥상에서 영화와 음악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