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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륜 May 17. 2016

악기를 다시 꺼내다

입사 후 취미생활 두번째, 클라리넷 레슨

중학교 1학년 때, 한 살 어린 동생이 처음 트럼펫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동생보다는 무조건 더 좋은 것을 갖고싶고, 더 좋은 것을 배우고 싶은' 철없는 중딩이었고 악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뭐라도 배우고싶다고 졸라댔고 (사실 여성스러운 플룻을 불고 싶었지만) 당시 동생이 몸담고 있던 오케스트라 단장님이 내 지랄맞은 성격에 플룻같이 예민하고 날렵한 음색의 악기는 정신건강에 안좋다며 클라리넷을 권했다. 동생에 대한 질투에 눈이 먼 나는 클라리넷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클라리넷을 배우겠노라 대답했다.



그 질투는 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동생보다 더 많은시간 연습했고, 동생보다 더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 오케스트라가 처음 생겼다. 보통 피아노로 시작해 바이올린, 첼로, 혹은 플룻으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우리 동네 또래들 사이에서 트럼펫 하는 동생과 클라리넷을 하는 나는 꽤 희소가치가 있었다.


중학교 2,3학년 때는 거의 오케스트라가 내 학교생활이 전부였다고 할만큼 정성을 쏟았다. 매일 아침 모여 연습을 하고, 점심시간, 방과후를 가리지 않고 연습실을 드나들었다. 꼭 연습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모여서 놀았다.

마침 오케스트라에서는 '오보에' 연주자가 필요했다. 비싼 악기라 배울 엄두가 안나는 오보에였다. 악기는 연습용이지만 새 것으로 학교에서 사놓았다. 하지만 불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보에는 클라리넷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마우스피스에 리드 한 겹을 붙여 부는 클라리넷과는 달리, 리드 두 장을 겹친 겹리드를 사용하는 악기라 주법이 완전히 다르다.


나는 운이 좋게도, 오보에를 1년간 불 기회를 얻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비싸고 귀한 악기라 취미로 할 엄두는 안났는데, 다행히 음악선생님이 오보에 전공자였던 덕분에 학교에서 공짜로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1년 오보에로 잠깐 바람을 피고, 고등학생 때 다시 윈드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당시엔 어리고 습득력이 빨라서인지, 3rd클라리넷으로 시작했지만 곧 1st 클라리넷으로 자리를 옮겨 연주를 했다. 연1회 꽤 큰 아트센터에서 정기공연도 했다. 악기가 내 '취미' 라고 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악기보다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기대를 안고 들어간 대학 내 오케스트라는 너무 실망스러웠던 반면, 악기 외에 다른 외부동아리활동에 빠져 슬슬 악기를 놓았다. 그 이후에 교환학생으로 중국에 오래 나가있었고, 갔다오자마자 치아교정을 시작하면서 악기는 장롱 구석에 한참을 잠들어있었다.


'언젠가 다시 시작해야지, 꼭 다시 해야지' 라는 마음은 있었지만 마음처럼 행동이 움직여지는 건 아니었다. 회사 핑계, 악기 수리 핑계, 배울 곳이 없다는 핑계, 시간이 없다는 핑계...


그렇게 핑계만 대며 스스로 도망갔었는데, 작년 말 우리병원 교수님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오케스트라에서 원내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아 나도 저 무대에 다시 서고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병원은 연1회,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를 연다.

그 오케스트라 공연을 잠깐 같이 보고 나온 우리 팀장님께 "팀장님 저도 저 활동 해도 돼요?" 라고 입밖에 얘기를 꺼낸 것도, 악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됐다. 팀장님이 내가 악기를 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팀장님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4월, 한화교향악축제에 함께 다녀온 우리병원 간호사가 입사 후 가끔 바이올린 레슨을 받고, 5월 말부터 저 오케스트라 연습에 참여한다는 얘기도 좋은 자극제가 됐다. 그 얘기를 듣고 바로 악기 수리를 맡기러 갔다.

오래 잠들어있던 악기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키는 전부 색이 바랬고 나무도 퍼석해졌다.

 마우스피스는 바꿔버리는게 속시원할 것 같았다. 거금을 주고 악기의 구석구석을 다 손봤다. 피스도 새로 샀다. 오랫동안 방치한 대가는 컸고, 속이 쓰렸지만 그 덕분에 열심히 다시 불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본전 뽑아야지.



호흡도 딸리고, 주법도 기억이 안난다. 우리병원 교수님들이 다닌다는 클라리넷 학원 선생님은 '8년이나 불었는데 이것밖에 안돼?' 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만 같다. 첫 레슨은 스스로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오래 묵혀있던 악기의 먼지를 털고, 다시 시작하기까지 그 결심과 용기는 내가 올해들어 한 일 중에 best5에 꼽힐만 한 일이다.

오랜만에 악기가방을 들고 레슨가는 길.


중고등학생 때, 아주 힘들고 외로웠을 때 악기가 많은 위로가 됐다. 잊고있던 취미지만, 직장인이 되어서도 계속 할 수 있는 취미가 있다는 일,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앞으로 지치고 힘들 때 위로가 되어줄 걸 알기에 작고 미흡한 한 호흡이라도 정성껏 내뱉기로 했다. 이젠 '동생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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