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기업 퇴사 후 프리랜서로...
어느덧 프리랜서 영상 번역가로 일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이젠 직장인으로 일했던 기간보다 프리랜서로 일한 기간이 더 오래됐습니다. 저는 영상 번역가로 전향하기 전에 외국계 기술 번역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기술 번역이라고 하면 주로 소프트웨어의 매뉴얼이나 텍스트, 문서 번역을 많이 떠올리는데, 실제 작업은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IT 콘텐츠의 전반적인 번역을 다루는 분야라고 할 수 있죠.
보통 외국계 회사는 계약직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본사에서 TO가 나면 정직원으로 전환됩니다. 저는 인턴으로 입사하여 내부 프리랜서로 일하다가 정직원으로 전환되었고 이후에 퇴사하였습니다. 참고로 내부 프리랜서는 출근하여 사내에서 근무하는 프리랜서를 말하며, 외부 프리랜서는 회사로부터 작업을 받아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를 말합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은 내부 프리랜서가 번역, 감수 외에도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한다는 점에서 외부 프리랜서와 차이가 있었습니다.
연차가 쌓이면서 복잡한 업무들도 하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았고, 나름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일을 처리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번역 비중은 점점 줄어들었고 감수와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관리 업무에 치중하게 됐습니다. 워낙 바쁜 프로젝트라 감수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서 번역을 외주로 돌리고 내부에서 감수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으니까요. 감수 업무의 비중이 높아지다 보니 제가 번역가가 맞는지 정체성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인턴이나 내부 프리랜서로 일할 땐 다양한 번역 업무를 접할 기회가 많았죠. 번역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번역에 목말라 있었고, 번역에만 오롯이 집중하려면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계속되는 야근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는 와중에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하는 시간만 늘어갔습니다. 번역에만 집중하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기계적으로 일하는 삶에 무력감을 느껴 자연스레 퇴사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취업만 하면 일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은 끝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더군요.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확고해지자 무작정 유럽행 티켓을 끊었습니다. 여행 기간은 자그마치 3개월이었죠. 막연히 프리랜서 번역가로 전향하겠단 생각만 했지,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할지는 여행하면서 천천히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퇴사 자체도 큰 모험이었는데 은행 예금까지 깨서 해외여행이라니 엄청난 사고를 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때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어디로든 떠나야 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던 터라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를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은 무모하지 않았나 싶지만, 그 여행으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덕분에 힐링은 제대로 했지만,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며 감탄하느라 진로 고민은 뒷전일 때가 많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면 생각이 다 정리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그대로였죠.
그러던 제가 어쩌다가 영상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는 다음 글에 이어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