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하철단골 Sep 30. 2019

택시기사님

자랑할 건 많지만, 현재의 자신은 숨기고 싶었던

부산 여행을 갔다 왔다. 부산역에서 내려서, 아내는 택시를 타고 싶어하는 눈치였고, 나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고 싶어했다. 아내는 편리함에 돈을 쓰는 것에 나보다 관대한 편이었다. 결정적으로 숙소에 체크인 하기 전에, 점심 식사를 하러 가야할 곳이 대중 교통으로 가기 매우 힘든, 거의 불가능한 곳이라는 것이 설득 포인트가 되어, 우리는 택시를 탔다.

기사님은 매우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지셨다. 우리는 달맞이 고개의 Sabbiya라는 이태리 식당을 아시느냐고 했고, 기사님은 당연히 모른다고 했다. 주소를 찍고 갈 수 있겠냐고 했더니, 일단 달맞이 고개를 갈 테니, 거기서 인터넷 지도 또는 내비로 길을 찾으라고 했다. 기사님과의 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기사님; 요새는 식당 이름을 그렇게 외래어로 이름을 많이 짓습니까?

아내;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그런편인 것 같아요.

기사님; 그래요? 거기는 무슨 식당인데예?

아내; 이태리 식당이요.

기사님; 이태리요? 이태리 가봤습니까?

나; 아니요. (사실 가봤다. 아주 어릴 적에 단체 관광으로.)

기사님; 이태리의 수도 로마를 R, O, M, E 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태리에서는 R, O, M, A 로마라고 합니다.

나; 아, 그래요.

기사님; 부산에서 택시 기사한테 좋은거 배우네예. 이런 거 알려주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나는 이태리 가봤다 아입니까. 이태리 음식이 근데 참 입에 안 맞대예. 스페인은 가봤습니까?

아내; 아니요, 안 가 봤어요.

기사님; 스페인에 왜 그 소세지 같은 거 있다 아입니까. 엄청 짜더라고. 입 맛에 안 맞아.

아내; 하몽이요?

기사님; (깜짝 놀라 진짜로 몸을 돌려 뒤를 돌아 봤다. 하몽을 아는 것이 마치 유럽학 박사학위라도 딴 것처럼.) 맞아요. 하몽을 압니까?

아내; 요새는 많이 먹어요.

기사님; 아니 그걸 많이 먹는다고요? 아유, 난 그거 입에 안 맞던데. 너무 짜서.

아내; 입맛에 익숙하지 않으셔서 그럴꺼예요. 우리 나라 젓갈 같은 거죠.

기사님; 족발이라은 다르지예.

아내; 젓갈이요.

기사님; 아. 그런가예. 고디바 먹어 봤습니까, 고디바. 이게 아는 사람들은 많아도, 비싸서 많이 못 먹어 본다 아닙니까.

나; 그쵸, 초코렛이 너무 비싸요.

기사님; 발렌타인은 몇 년 산 먹어 봤습니까?

나; 아직 못 먹어 봤어요.

기사님; 보통 미국 중산층에서 귀한 손님 오면 17년산 한 두잔 준다고 합니다. 30년 산은 면세점에서 사면 훨씬 쌉니다. 백화점 가면 몇십만원 합니다.

나; 아, 주류가 세금이 쎄죠.

기사님; 요즘은 발렌타인 40년 산도 나와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더러 먹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알라고 하는 말하는 거지예. (그 쯤에 전봇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캄보디아에 가면 뱀이 많아서, 감고 올라갈까봐 전봇대가 네모 모양입니다. 부산에서 택시 기사가 좋은거 많이 알려주네예.

아내; 여행 많이 가셨네요.

기사님; 사람이 쫌만 말해보면, 그 지적 수준을 알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내가 원체 여행을 좋아해요.

아내; 어디가 제일 좋으셨어요?

기사님; 그랜드 캐년 가봤습니까?

나; (역시 가봤지만, 굳이 가봤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요.

기사님; 그랜드 캐년이 제일 좋지예. 아니 근데 북유럽이 진짜 좋아예. 북유럽은 복지가 엄청 좋다 아닙니까. 대신 세금이 비싸서 물가가 엄청 비싸예. 지금 가면 한 사람당 600만원씩은 내야 할낀데.

나; 좋은 곳 많이 다니셨네요. 자식분들이 효도 하시나봐요.

기사님; 우리 아들이 서울대 나왔다 아닙니까. 부산에서 서울대 갈라면 전교 1-2등은 해야 갑니다. 그리고 서울에 17억 짜리 아파트도 해줬어요.

나; (괜히 정확히 하고 싶다.) 지금 17억이 됐다는거죠?

기사님; 아니 그 서울 XX아파트 17억이라니까예. 사돈에서 도움 안 받고 내가 해준겁니다. (동문서답으로 교묘하게 빠져나가셨다.)

나; 우와, 대단하시네요.

기사님; 내가 군인 장교 출신이었어요. 영어도 잘 하니까, 외국 여행 나가면 영어로 의사 소통도 하고. 파리 루브르 박물관 같은 곳은 화장실이 1유로야, 1유로.

나; 군대는 육해공 중 어디계셨어요?

기사님; 육군이었습니다. 베트남 월남 전에 참전 했다 아닙니까.

나; 계셨던 지역은요?

기사님; 군인이야 계속 전국을 돌지예. (아, 맞다, 군인은 그랬지. 군대 시절이 떠오르며 괜한 질문 했다 싶었다.)

아내; 기사님 이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가주세요.

기사님; Right Turn? Okay. (한참 가다가) 내가 군인이라 모은 돈도 있고, 연금도 잘 나오니까 이렇게 여행도 많이 다니고 그런거지. 대화 해보면 지적 수준이 나오지 않습니까.

나; 그러게요, 군인 연금 되게 잘 나온다고 들었는데요.

기사님; 내가 지금 택시 운전하고 있어도, 로렉스 차고, 버버리 셔츠 입고 운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 우와, 기사님 롤렉스 시계 좀 보여주세요. (기분 좋게 해드리고 싶었다.)

기사님; 이거 보소. 이게 50년 전에 내가 롤렉스를 산 사람입니다. Fifty years ago.

나; 우와, 시계 멋지네요. 아니, 그런데 뭐하러 택시를 하세요? 집에서 쉬시지.

기사님; 택시 기사? 뭐 그냥.. (우물 우물 답 흐림) 아, 근데 사돈한테는 택시 기사 한다는 얘기는 안했어. 면이 있지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더라고.

나; 아, 네. (그 때 쯤 도착) 여기서 세워주시면 될 것 같아요.

기사님; 아, 여기가 이태리 식당입니까?

아내; 네, 다음에 한 번 와 보세요. (먼저 내림)

기사님; 이태리랑 비슷한지 한 번 봐야겠네. Have a Nice Day!

나; Have a Nice Day!


기사님은 내내 '택시 기사가 이런 사람이라서 의외지?'라는 듯한 뉘앙스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자신이 지금 택시 운전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 하시는 것이 좀 별로라고도 생각했다. 아니, 택시 기사가 뭐 어때서. 사실 자존심에 가족 생계 책임 안 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어도 안 하는 것이 더 별로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치면, 본인께서는 쭈욱 기사 생활을 해오신 다른 택시 기사분들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시는건가.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인간은 다 같이 존엄한데.


그치만, 그는 월남전에 참전한, 요즘 말로 꼰대라고도 할 수 없는, 꼰대 조상님격 할아버지셨다. 세대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시대에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더구나 보수적인 경상도에서, 위계질서가 중요한 군대에서 일생을 바치신 분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월남전 참전도 하고, 아들도 서울대 보내고, 좋은 집도 해준 그의 삶이, 참으로 그 시대 분으로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산 삶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기사님이 말씀해주신 내용 중에 재미있는 내용도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대화가 여운에 남았다. 캄보디아는 전봇대가 뱀이 많아서 사각형이라는 것은, 뱀은 사각형은 못 감고 올라가는지 궁금하게 했고, 나중에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해줬다.


기사님의 버버리 셔츠가, 오래 오래 낡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사님의 롤렉스가, 오랜 시간 멈추지 않고 고장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버리 셔츠와 롤렉스면, 가진 추억과 함께, 이렇게 젊은 외지 손님들이 올 때, 한 번씩 여행 이야기를 해주면서,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 사돈에게 들키지 않으시고 운전대를 놓는 그 날까지.



PS. 기사님과 헤어지고 나서 문득, '내가 웅진에서 임원까지 올라 갔던 사람이라,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씀해주셨던 서울의 택시 기사님이 떠올랐다. 승객들도 택시 기사님을 어떠한 시선으로 보지 않고, 택시 기사님들도 스스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