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할 게 없는' 멋진 여성 히어로와 미국 리버럴의 정신승리 그 어딘가
"영화 <캡틴 마블>에 대한 가벼운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는 개인적으로 히어로물과 그 서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남들이 열광하는 것 만큼 그렇게 재미있게 보진 않았다. 물론 그게 여성 히어로물이라 그러니 뭐니 하는 이유는 아니고, 히어로물이라는 장르 자체가 적잖이 패권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가 필요 이상으로 정치적으로 이입해서 보고있나 하는 생각을 상영시간 내내 했다.
마블 세계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수준이긴 하지만 '캡틴 마블' - 캐롤 '어밴저' - 댄버스가 마블 프랜차이즈를 대표하는 히어로 단체인 '어밴저스'의 이름이 될 만큼 상징적이고 중심적인 존재라는 것은 무척 가슴뛰는 일이었다. 세상에 여성 히어로가 백인 남성만 득시글대는 히어로 집단의 핵심같은 존재라니! 라고 하기에는 '어밴저' -복수자- 라는 이름의 함의가 굉장히 - 세계의 보안관을 자처하는 - '미국적' 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주지만...
먼저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영화의 전개가 무척이나 빠르다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전개가 스피디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마따나 다른 히어로물처럼 최소한 두 편에 걸쳐 해야 할 전개, 그러니까 인물과 배경 소개, 떡밥 풀기와 회수 등을 한 편으로 후루룩 해 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개가 꽤나 불친절하다고 느껴졌고, 영화의 아귀가 조금씩 안 맞는 구석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영화 전개가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불친절하니 보면서 좀 피곤한 구석도 있었다. 이야기 한 것처럼 차라리 다른 히어로 영화처럼 두 편 이상에 걸쳐 나왔으면 더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왔을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캡틴 마블 -캐롤 댄버스- 의 캐릭터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매력적이고 멋진 캐릭터인데, 마블이 더 멋져질 수 있는 가능성이 풍부한 캐릭터에 한계를 만들어버린 느낌이었달까. 곧 개봉할 <어밴저스: 엔드게임>의 개봉에 맞춰야 한다곤 하지만 왜 이 캐릭터가 영화 한 편으로 모든 이야기를 다 한 것처럼 되어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너무 빨리 사그라진 느낌이었다.
영화의 서사 자체는 뭐랄까, 미안하지만 공화당 또라이들에 밀린 미국 리버럴들의 정신승리 같은 느낌이었다. 똑같이 전쟁 일으켜놓고 공습 뻥뻥 해 놓고선 '전쟁을 멈춰야 해' 같은 소리나 하는... "우린 사실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좋아해! 평화를 위해 싸우는 거라고!" 라고 광광대는 걸 여성의 입을 통해 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힐러리 클린턴 생각이 나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론 그걸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다니, 참 구차하고 비겁하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미국은 전쟁을 뻑하면 일으키는 국가고... 최근까지 시리아에 미사일 뻥뻥 날려대던 국가인데, 특히 시리아에 토마호크 미사일을 날리고 항공모함을 대동해 하루가 멀다 하고 폭격을 해 대던 당시의 대통령이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였다는 것을 자기들이 망각해버린 것 같다는, 혹은 그걸 억지로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자신들은 사실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고, 난민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솔직히 이건 좀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캡틴 마블의 슈트가 성조기의 색으로 바뀔 때 '으...' 소리가 깊은 곳에서 튀어나올 뻔 했다. 다시 생각해도 영화에서 대놓고 구렸던 순간이었다.
여하튼, 나는 상영시간 내내 여성 히어로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미국 리버럴의 재수없는 정신승리 서사라고 생각하면서 봤고 개인적으로 히어로물 취향은 아니지만 어깨 딱 펴고 '나는 증명할 것이 없다' 고 이야기하는 여성 히어로물을 만난 것은 무척 기분좋은 일이다. 그렇다. 무슨 증명사진도 아니고 뭘 더 증명한단 말인가. 여성은 감정적이고 어떻고, 무언가 그런 여성답지 않음(이성적이고, 냉정하고, 똑똑하고 그런 식의 요소들)을 증명해야 한다는 가스라이팅과 사회적 압박을 깨부수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캡틴 마블이 힘을 찾고 각성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Nirvana - Come As You Are> 은 정말 탁월한 선곡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히어로. 세상에 너무 멋있잖아요.
마지막으로, 영화 보기 전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서구)의 리버럴들이 지닌 전쟁과 난민에 대한 생각들에 대해, 트랜스-내셔널(혹은 트랜스-스텔라...?)한 사고와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러 들어가기 직전까지 이 영화는 제1세계 페미니즘 중심의 영화이고, 트랜스-내셔널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똑같은 생각... 아니 정확히는 확신을 가지고 나왔다. 이 영화는 트랜스-내셔널적 한계를 지니고 있고, 그 한계점에 대한 끊임없는 지적과 문제제기, 그리고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에겐 더 많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난민 등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 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 히어로물 뿐 아니라 장애인 히어로, 난민 히어로 등도 충분히 나올 수 있고, 나올 때가 되었으니까.
덧붙여서, <캡틴 마블>을 보고 '마블 최악의 작품이네' '82년생 김마블이네' 하던 자칭 v영화 유튜버v 들은 영화가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어떤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는지 하나도 모르고, 심지어 관심도 없다는 걸 증명하셨으니 하루빨리 채널 문 닫으시고 나가 죽으시길 바랍니다. 님들이야말로 증명할 게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