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 네가 떠올랐다
요즘 책을 듬성듬성 읽는다. 마저 읽지 못하고 절반이 접힌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중에 나쓰메 소세끼 작가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소설도 포함된다. 고양이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내용이다. 읽던 중 인상 깊은 내용을 발견했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매일 여러 낯설고도 친밀한 사람을 만나는 나날 덕분일지 모르겠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아무 탈 없이 편안해 보이는 누군가도 시간을 두고 깊은 대화를 나눠보면 슬픈 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친구가 있었다. 3대에 걸쳐 가업을 자연스레 물려받는 안전된 코스. 그는 서른을 넘기지 전, 자기 앞으로 빌딩 하나가 있었다. 외제차는 기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친구와 더 가까워지려고 발버둥 쳤다. 모임 때마다 그는 자랑했다. "이번에 구입한 00차는, 여자 친구가 연예인 000을 닮았는데~"라는 식으로. 매년 차량과 여자 친구가 달라진다는 것은 안 비밀이다.
나는 평소처럼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문득 궁금해서 물었던 적이 있다. "그래, 잘 알겠다. 그래서 지금 너 행복하냐?" 딱히 깊은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참 웃던 친구가 표정이 굳어졌다. 이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전화가 울렸다. 그 친구였다. "그때 못했던 답을 해야 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수년간 알고 있었던 녀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잠깐 한숨을 쉬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차근차근 털어놓기 시작했다. 웃고 있지만 매일 불안하다고. 불면증에 시달린지도 한참 되었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모르지만 정신과에 자주 드나들고 있다고 했다.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 풍족하지만,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순 없었다. 자신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접근했기에, 믿고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에겐 언제나 강하고 단단한 아들이어야 했다. 그래야 가업도 잘 물려받을 수 있으니까. 분명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주 아팠다.
우린 지금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 나는 대부분 듣는다. 변함없이 묵묵하게. 여전히 다른 친구들 앞에서는 약간의 허세와 감투를 둘러쓰는 모습이 보이곤 있지만, 조금씩 자기 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다. 그 친구에게도 브런치 작가를 권했는데,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니 수차례 낙방했거나 작가 지원 자체를 안 했을 수도 있겠다.
짬 내어 읽었던 소설과 문장 덕분에 그 친구를 복기할 수 있었다. "너 이야기 써도 되겠지?"라고 물었더니 "알아서 해."라는 말했다. 나는 지금도 매일 목격한다. 숱한 고민과 어려움을 감싸 안고 살아가는 여러 이들을 목격한다.
며칠 전, 심야로 관람했던 <82년 김지영>에서 여주인공이 여러 과정 끝에 정신과 박사 앞에 앉았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한다. 그 첫 대면에 박사에게 김지영은 묻는다. "제가 좋아질 수 있을까요?" 박사는 대답한다. "오랜 시간 일해보니까, 제게 상담받는 분들의 가장 어려운 지점이 무엇인 줄 아시나요? 여기까지 오는 과정입니다. 두렵고 불안함 속에 이곳을 찾아와 제 앞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지점까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만났으니, 가장 어려운 과정을 넘긴 샘입니다. 좋은 일만 남았습니다."(기억나는 대로 썼기에, 조금씩 실제 대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그렇게 듣기만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명확한 해답과 방향성을 제시해줘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웃었다. 답과 방향은 스스로 찾는 거니까. 용기 내서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지점부터 전후 상황이 달라진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때부터 조금씩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갈무리는 이름 없는 고양이 철학자의 멘트로 마무리해야겠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일기라도 써서,
자기의 참모습을 발산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나,
우리 고양이족은 일상생활 자체가 거짓 없는 일기이니
귀찮은 수고를 하며 자기의 참모습을 보존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