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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Aug 14. 2018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나는 읽고서 쓰고 듣고서 쓰고 보고서 쓰고, 경험하고서 쓴다.

“한 줄의 문장을 짓기 위해 오늘도 수백 개의 감각과 기억을 사용한다.”     
<모든 요일의 기록>

무더웠던 여름날이었다. 운동과 출퇴근을 겸할 요량으로 샀던 자전거를 타고 시내의 서점으로 향했다. 두리번거리다가 찾으려던 책을 발견했다. 지인이 귀가 따갑도록 추천했던 책이었다. 글쓴이가 카피라이터라 그런 것일까. 표지를 시작으로 내용 곳곳에서 정성 들여 쓴 문장들이 보였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을 쓸까.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담을까. 더 궁금해서 자전거를 계속 탈 수 없었다. 동구 양림동의 빛바랜 한옥집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 자리에서 <모든 요일의 기록>을 마지막 장까지 읽어버렸다. 재미있고, 흥미롭고, 읽으면서 즐거웠다.     


p.30

“내가 신기한 책 하나 보여줄까?”

그리고 남편은 책 한 권을 꺼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책이었다. 아니 수없이 본 책이었다. 우리 집에도 있는 책이었다. <자본론>이었다. 그런데 책이 이상했다. 책이 아팠다.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갖은 방법을 통해 고문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책으로 재현한다면 그 모습일 것 같았다. 아니, 고문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소중히 읽었다는 걸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소중히 한 글자 한 글자 쓰다듬으며 읽었다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읽었으면, 얼마나 잘근잘근 씹으며 읽었으면, 얼마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좌절하며, 희망하며, 다시 좌절하며 읽었으면 책이 이럴까. 모든 장이 손때가 덧입혀져서 부풀어 있었다. 종이 한 장보다 손때의 두께가 두꺼웠다. 제본은 이미 오래전에 떨어졌다. 하지만 다시 가다듬고, 다시 떨어지고, 다시 가다듬은 흔적들이 보였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시간을 산 것일까. 80년대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경제학에서 사학으로 전공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그 청년은 어떤 시간을 견딘 것일까. 언제나 정중하게, 언제나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고, 말하기보다는 듣는 모습이 더 익숙한 선생님은 어떤 시간을 통과한 것일까. 아득했다. 몇 번 뵌 적도 없고, 오래 말해본 적도 없는 선생님이었지만 갑자기 선생님의 모든 시간을 다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책 한 권이 그랬다. 글자 한 자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책은 모든 것을 제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p.58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절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그리스 비극에 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소포클레스 니 에우리피데스 니 전혀 관심이 없던 고대 그리스 극작가들에게 왜 갑자기 관심이 생겼던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수업에서 기억나는 것은 당혹감이다.

도대체 이것은 왜 비극인가. 아니, 이 비극을 통해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오이디푸스에게서 나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결국 그 운명대로 모든 것이 되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자신의 눈을 뽑아버린 오이디푸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쓰고, 그 운명으로부터 도망을 쳐도 결국은 운명대로 될 수밖에 없다는 그 좌절감 앞에서 나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인가. 왜 고대 그리스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그들은 비극을 쓰고, 공연하고, 그것에 열광했을까. 왜 그 빛의 한가운데에서 어둠을 상상했던 것일까.

비극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 모두의 태도는 같았다. 결코 운명 앞에서 구차하지 않았다. 낙담하거나 체념하지도 않았다. 끝까지 의연했다. 바뀔 수 있는 것은 어차피 아무것도 없었다. ‘운명’이라 그러지 않는가. 신들조차 바꿀 수 없는,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나에게 주어진 나의 ‘운명’.

그들은 비극적은 운명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운명 앞에서 얼마나 고귀하게 사는가, 그리고 얼마나 용감하게 죽느냐, 라는 태도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물론 비행기를 놓친 나의 하찮은 비극을 감히, 그리스 비극 속의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영웅’까지 불러와서 비교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그때 나아게 이 구절이 다가왔다.    


p. 77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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