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춘프카 Oct 14. 2018

[다시 쓰는] 올레길 18구간·성산일출봉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

새벽 내내 흔들려서 잠을 뒤척였다. 다행히도 눈을 떠보니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해 있었다. 지난밤, 뜻깊은 시간을 함께했던 아저씨 세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 뒤, 힘차게 걸었다. 여객선 터미널 입구를 기준으로 좌측은 올레길 18구간이 시작되는 부근이었다. 제주도에서 첫 번째 묵는 곳은 성산 근처로 잡았기 때문에, 체력이 되는대로 걷고 힘들면 택시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18구간은 다른 올레길보다 유독 주민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책을 나온 그들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큰 배낭에 낑낑 되며 걷고 있는 나를 보면서 ‘젊은 사람이 영~ 힘이 없어 보인다.’고 할머니 한 분이 웃으면서 말했다.
 
두 시간 정도 걷고 나니 배도 고프고 피곤하다. 이른 아침부터 걸었던지라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식당 문은 여전히 닫혀있는 상황.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그대로 성산에 숙소까지 이동했다. 기사님은 제주도 토박이. 여러 가지 여행 정보들을 알려 주신다. 무엇이 맛있고, 이렇게 여행하면 좋다, 혼자 여행 다니는 거 부럽다고 말했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자주 들었던 말이 ‘혼자 여행해서 부럽다.’인 거 같다.
 
대화하며 가다 보니 어느새 숙소가 보였다. 기사님께 인사를 한 뒤,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했다.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올해는 정말 장사가 망했다면서, 태풍이 연달아 올라오다 보니 예약해 두었던 손님들도 다 취소하고 다들 울상이라고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성산 일출봉으로 걸음을 옮겼다. 빼곡하게 모여든 여행객 덕분에 가만히 지켜보는 나까지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중국말이 오갔다. 제주도에 최근 젊은 사람들이 이주를 많이 하는데, 중국말만 할 줄 알면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말이 문뜩 기억났다. 정말 그래 보였다. 일출봉 정상까지 오고 가는데 우리말은 거의 듣지 못했다. 마치 중국에 어느 곳에서 혼자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이리저리 시간을 보내도 숙소 입실시간인 오후 4시까지는 한참 남았다. 하는 수 없이 근처 자전거 대여점에서 만 원을 주고 1일 자전거를 빌렸다. 해안가를 따라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시원한 바람이 내 볼을 스친다. 기분이 좋다. 그렇게 낯선 길목을 돌고 돌아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했고, 숙소에 다시 들어가서 배낭을 풀었다.
 
제주도 첫날 묵을 장소는 '성산 게스트하우스'다. 성산 일출봉 매표소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곳이다. 성산 일출을 볼 생각이라면 이곳으로 묵는 게 답이라고 책에서 나온다. 그것과 더불어 매력적인 것은 '제주 성게가 들어간 따뜻한 성게 미역국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나와 있지만, 내일은 '전복죽'이라고 한다.
 
2011년 6월에 문을 연 성산 게스트하우스는 일출봉 외에도 조금 걸어가면 광치기 해변과 맞은편 작은 호수까지 걸어서 소소한 볼거리가 많다. 자전거도 무료로 대여해 주고 있다. 저녁에는 신청자에 한하여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다(오후 6시 30분까지 신청을 받는다). 하룻밤 묵기에는 딱 좋은 곳.
 
남자 숙소 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나처럼 홀로 여행을 즐기는 남자들이 순서대로 들어왔다. 아직 서로 어색하게 눈치싸움만 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신청자에 한하여 바비큐파티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먹서먹해서 서로 눈치만 보던 상황이었다. 기계 한 대에 500만 원이라고 자랑을 하시는 사장님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고기를 정성껏 구워 주셨다. 고기가 나오고 기본 반찬이 준비되자, 말로만 들었던 제주도산 소주를 직접 맛볼 수 있었다. 소주가 나온 전과 후의 분위기는 상상을 못할 정도로 달랐다. 오가는 소주잔 속에 각자 여행의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내 앞자리에 있던 훈훈한 남자가 있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왔다. 그런데 계속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분명히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데, 사연을 들어보니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올해 초에 카이스트에 1년 교환학생으로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들과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캐나다에서 제주도로 함께 여행 왔다고.
 
 
술이 조금씩 들어가고 어머니가 자리를 비우시자 서툴지만, 한국말로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 대학생들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한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 보면 안타깝다고. 캐나다에서는 일보다는 여가생활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인데, 한국은 다른 것 같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취업 안하려고 한다. 너무 힘들어요, 라고 말했다. 나는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맞아요. 그런 모습에 한국도 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따뜻한 구석도 많아요. 한국의 더 아름답고 좋은 모습과 사람을 많이 만나고 갔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물론 영어는 못 하니까 우리말과 제스처로.
 
내 옆에 있던 여자분들 두 명은 친구라고 한다. 그리고 제주도 사람이다(방문자 숙소에서 제주도 출신 분들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 바로 옆자리에 있던 분은 굉장히 술을 빨리 잘 드셨다. 한잔하고 내 잔이 비워진 것을 보면 바로 채워 넣었다. 제주도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일한 지는 1년 되었다고 한다. 주위에서 온통 제주도 사람 아닌 것 같다고 말하니까 어떻게 생기면 제주도 사람 아닌 것 같으냐고 되물었다. 내가 보기에는 약간 하지원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제주도 친구 두 명은 오토바이로 여행을 즐기고 있으며 내일은 우도를 가볼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 우측 편에 자리 잡은 짝이 한 쌍 있었는데, 둘 다 대전출신이고 현재는 장거리 연애 중이라고 했다. 만난 지는 4년. 연하남인 남자 친구는 나랑 동갑이었다. 더 대박인 것은 내가 사는 곳이 창원이라고 하니까 본인도 창원엘 지에서 일한 지 1년째라며, 창원에 아는 사람 없어서 불편한 게 많다고, 창원에서 꼭 한 번 연락하자 말했다. 연상의 여자 친구는 우리보다 2살 더 많았다. 밝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금세 친해졌다.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짝이 있었는데, 만난 지는 2년 되었고 남자분은 컴퓨터 프로그램 설계하는 쪽에서 일하다가 큰마음을 먹고 회사를 퇴사, 지금은 힐링하기 위해 여자 친구와 왔다고 했다. 여자친구분도 정말 끼가 넘치고 재미있는 분이었다. 가장 어려 보였는데 두 짝이 우리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다.
 
바비큐파티가 무르익어가고 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다. 조심스럽게 2차 제안이 나왔고 우리는 근처 호프집에서 모자란 이야기를 채워갔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의 장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