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곽유찬을 기억한다. 그는 수줍음이 많았다.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해 조금만 움직여도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을 흘렸다.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학창 시절이었겠지. 고향인 경남 고성군은 산과 들로 이뤄진 시골이라 적막하다고 자주 내게 말했다.
나와의 인연은 스무 살 때였다. 대학에서 같은 과로 만났다. 딱 봐도 힘없이 비틀거리는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걱정 어린 시선과 동시에 이유는 알 순 없지만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다. 점심 때는 소리소문 없이 혼자 식사를 해결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먼저 말을 걸었다. 마치 마음에 드는 이성친구에게 말하듯이 다감하게 "우리, 짜장면 먹을래?"라고 말했다. 그는 눈빛을 초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좋게 짜장면과 단무지를 나눠 먹으며 친구가 됐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우리는 빈번히 만났고 자주 연락했다. 녀석은 몸이 안 좋아서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쫓겨나 고향집에 와있는 상황이었다. "자유롭고 싶다."라고 자주 말하는 그에게 조심스레 내가 쓴 글을 전했다. "내가 언론사를 들어갈 건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말할 사람도 없는데...) 너만 읽어."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가 쓴 글을 읽다가 조용히 휴지통에 구겨 넣었다.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할 테니까, 일찌감치 그만둬. 이건 아니야." 내심 섭섭했지만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는 공대생이 글쓰기를 이제 막 시작했으니 친구의 말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었다.
동윤이는 수년간 나의 첫 번째 독자로 역할을 해왔다. 내가 4번의 탈락에 좌절하다 언론단체와 지역일간지 신문사, MBC경남 시사 라디오 DJ를 동시에 맡았을 때도 제일 먼저 기뻐했다. 비록 시골에서 내 글을 읽는 처지였지만 날카롭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대부분 동윤이 말대로 수정하면 훨씬 좋았다. 그리고 서울의 언론사에 입사해 생활하다 낯선 광주 근무지를 발령받았을 때도 내 넋두리를 들어줬다. '춘프카'라는 필명을 짓고 브런치 작가로 데뷔했던 2016년에도 한결같이 내 글을 먼저 읽어줬다.
작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초저녁이었는데 안 본 지 수년째가 되었다며 지금 당장 자기가 사는 곳으로 와달라고 때를 쓰는 것이었다. 그런 성격이 아님을 알기에 살짝 불안하기도 해서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광주에서 동윤이 집까지 편도로 195.3km가 찍혔다. 쉬엄쉬엄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정말 어두컴컴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밤하늘의 별이 눈부시도록 반짝였다. 저 멀리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그 녀석이었는데 몹시 괴로워 보였다. "몸이 계속 안 좋아진다. 직장도 다닐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못 만나고. 나랑 세상을 연결하는 창구는 너밖에 없다. 너무너무 죽고 싶었거든. 네가 고생할 걸 알면서도 굳이 불렀다. 진짜 올지 몰랐는데, 미안하고 고맙다."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줬다. 숨소리가 약했다.
같은 해 9월 추석 명절기간에 한통의 메시지가 울렸다. 동윤이 누나였다. "어제 편한 모습으로 떠났어요. 친구로 저장되어 있는 분이 딱 한 사람 있어서, 조심스럽지만 연락드렸습니다." 이내 동윤이는 떠났다.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의 삶이 떠올라 마음이 저렸다. 그렇게 나는 처음이자 유일한 독자 한 명을 잃었다.
동윤이 덕분에 잠깐이라도 만나는 이에게 최대한 몰입하게 됐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만나고 헤어질 때면 마음이 허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한참 지나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싶었다.
가끔은, 그리운 것도 사치처럼 여겨졌다. 그대로 있으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아서 더 분주히 움직였다. 일을 만들고 공부하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났다. 바쁘게 사는 건, 이별을 조금은 무디게 했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이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