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독서록] 김영하의 <읽다>
김영하라는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팟캐스트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을 통해서였다. 차분한 목소리로 묵묵히 책을 읽어나가는 그의 방송을 처음 접하며 ‘이렇게도 방송할 수 있구나.’ 싶었다. 말 그대로 책을 읽는 게 전부였다(작가 소개, 책을 선정하게 된 이유, 작품의 숨은 에피소드들도 때때로 등장한다).
그 ‘용기 있는’ 방송을 착실하게 들었다. 그리고 방송에서 소개된 여러 책들을 읽어 보기도 했다. 물론 김영하의 소설도 몇 편 읽었다. 카프카 느낌의 몽환적인 문체가 두드러지고 깊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삼문 3부작 <보다>, <말하다> 그리고 <읽다>를 순차적으로 출간되는 대로 읽어나갔다. 그의 소설이나 산문집은 재미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언제나 분주했다.
산문집 마지막 완결작인 <읽다>는 그가 총 여섯 차례 독서와 관련된 실제 강연의 원고를 합하여 만든 책이다. 덕분에 실제로 말하는 듯한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그가 소설가이기 전에 한 사람의 부지런하고 착실했던 독자로써 책을 느끼는 부분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참 아끼고 소중히 해가며 책을 섭렵해왔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김영하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죽어도 책은 시대를 초월하며 살아남는다'라고. 살아남은 고전은 예전에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지만, 다시 새로 읽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 새로움은 우리에게 ‘그 책은 이미 알고 있다’고 자만했던 마음을 반성케 한다.
고전에 대하여 보르헤스는 전함, 함대가 질서 정연하게 정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고전을 대표하는 선두 진영의 함대라고 볼 수 있다.
고전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에, 마치 처음 읽는 것 같은 새로운 느낌을 위해서 고대의 작가들은 지금의 사람들이 참조하고 있는 기법들을 이미 도입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 새로운 면이 고전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비결이라고 한다.
그가 예로 들었던 소포 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단 하루 만에 완벽했던 그의 인생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준다.
“비극은 대부분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내재된 성격적 결함으로 파멸하는 얘기다.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이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비극도, 희극도 아닌 우리 사회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도대체 무엇인지, 나의 인생이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될지, 희극으로 마감할지 나는 예측할 수가 없다.
김영하에게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을 감염시키고, 행동을 변화시키며, 이성을 파괴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책은 나를 무섭도록 변화시키고 있다. 책에 완전히 등을 돌렸던 과거를 비교하더라도, 다시 시작한 독서는 나의 사고를 다양한 관점의 시각으로 바꿔주고 있다. 책은 한 인간을 완벽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무서운 사물임에 분명하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일면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에는 죄책감, 피해망상, 불안감과 같은 다양한 감정에서 헤매기 위함”이라고 한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정해진 미로에서 굳이 탈출하지 않아도 기분 좋게 삶을 일탈한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지와 무지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라만차의 돈키호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일에 미쳐있고, 독서에 미쳐있고, 광기 어린 분노에 미쳐있고, 좋아하는 것에 미쳐있고, 맹목적인 이념에 미치기까지 한다. “우리들은 너무 많이 읽거나 너무 많이 입었기 때문에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도 썼다. “소설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을 철저히 짓밟기도 한다. 특정한 결말을 기대하는 것은 선입견이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이 원하는 대로 결말을 꿈꾸기도 하지만, 꿈과 달리 소설의 결과는 사라지지 않는 불멸한 꿈이다. 소설은 작품마다 읽은 시각과 다양한 관점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한다.”
“독자는 하는 수 없이 주인공에 대한 혐오감과 작품에 대한 호감을 조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원하면 소설을 읽는 것을 중단할 수 도 있고, 작가의 생각엔 동의하지 않지만 끝까지 읽는 것도 나의 자유다. <롤리타>와 같은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에게 돌을 던지는 상상을 하지만, 끝까지 다 완독 한다고 해서 소설 속 주인공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읽는 행위는 끝없는 투쟁이다. 작가가 원하는 대로 읽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작가의 의도를 거부하면서 손을 놓지 못하게 되는 상황도 일어나게 된다.
“등산 가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더욱 경험이 풍부하고 강해진다. 때로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소설은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과 싸우며 읽어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