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별 Jun 12. 2024

아빠가 바람이 났다고 굳게 믿는 엄마

느 날과 비슷한 날이었다. 동생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부모님 댁에 잠시 들른 날이었고, 저녁이나 먹고 갈까 하고 배민 어플을 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엄마 왜 그래?"


동생이 엄마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 나는 이상한 낌새를 채지 못했다. 동생의 말에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보니, 묵주를 손에 들고 불안한 듯 거실을 서성이고 계셨다.


"무슨 일 있었어? 말해봐~."


엄마는 평소에 아빠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일이 많았었고(자신을 무시했다든가, 자기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로), 그때마다 항상 입이 삐죽 나오거나 했기 때문에, 그때도 아빠에게 뭔가 서운한 일이 있었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동생의 말을 들은 엄마는 무언가 결심한 듯 불안하게 옮기던 발을 멈췄다. 그리고 동생과 나를 보고 말했다.


"너희 아빠 바람났어. 어떤 여자랑.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아빠를 쏘아봤다. 5초 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내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닌 것 같아서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화를 내며 방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엄마를 옆에 앉히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엄마의 말은 들을수록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50년 전 아빠가 대학생 때 만났던 여자를 지금도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의심이 가는 상황이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며칠 전에 자신이 분명히 눈치를 챌 만한 상황이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걸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우리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할 때마다 비웃음을 보였다. 엄마는 항상 따뜻한 표정을 짓던 사람이라서, 그런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아빠가 바람이 났다고 굳게 믿는 엄마는 연신 손을 떨고 있었고, 표정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엄마랑 제일 가깝게 지내왔던 동생은 참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 눈물을 쏟았다. 엄마에게 해명 아닌 해명을 하다 지친 아빠는 저녁거리를 사러 나가셨고, 나는 엄마를 데리고 바람을 쐬러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엄마는 다시 예전의 엄마로 돌아온 것 같았다. 우리는 평상시 나누던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아깐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싶을 때 엄마에게 슬쩍 떠보듯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곧 다시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얘기하지 마!"라고 했고, "아빠가 진짜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해?" 물으니 "응."이라고 했다. 나는 포기하고 다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엄마랑 집에 돌아온 뒤에는 다 같이 저녁을 먹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상시처럼, 아니 평상시보다 더 밝게 수다를 떨었다.


밝은 분위기 속에서, 말은 안 해도 우리는 느끼고 있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일이 어느새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