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코쿠리코 언덕에서

그 언덕에서 일어났던 아주 작고 사소한 사랑 이야기

by Scarlet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드물 것 같다. 나는 꼭 지브리 애니 중에서 그런 것만 골라 본다. 한국 사람들은 몇 명이나 이 애니메이션을 알까. 코쿠리코 언덕에서, 귀를 기울이면, 추억은 방울방울.... 그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 없는 영화가 이 영화가 아닐까 한다. 미야자키 고로가 감독을 맡았던 마지막 2D 애니메이션. 지브리 그림체가 가장 내 취향이던 시절의 이야기. 이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내게 커다란 감동을 준다. 볼 때마다 아름다운 풍경이 내 시선을 사로잡고, 몇 번이나 본 익숙한 스토리에도 다시 감동을 받는다.


물론 '마녀 배달부 키키'나 '이웃집 토토로'처럼 인기 있는 영화도 좋아하지만, 역시 내가 좋아하는 건 잔잔하고 평안한 세계다. 어떠한 위협도 두려움도 없는 세계. '모노노케 히메'처럼 파괴되는 세계,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전쟁이 일상으로 번진 세계, '카구야 공주 이야기'처럼 엔딩이 슬픈 세계는 어쩐지 계속 보고 있기 힘들다. 나이가 들었다는 신호인 것도 같다. 예전에는 저런 것을 좋아했었다. 저 셋을 다 갖추고 있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내 애니메이션 역사의 한 획을 그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평화롭고 따뜻하며 행복한 세계를 원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어쩐지 미묘한 위치에 있다.


내 친구는 이 애니메이션을 몹시 불편해했다. "이 시대의 일본인이 이만큼 살고 있는 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이야." 그렇다.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우미의 아버지는, '조선 전쟁'으로 사망한 선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의 비극을 스쳐 지나가는 배경 속에 하나둘씩 집어넣곤 한다. 개인적으론 그래서 '바람이 분다'도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다. 그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아닌, '전쟁' 자체의 공포와 참상을 굉장히 잘 그려낸다. 우미 또한 그렇다. 부친 없이 지내는 그녀에게 무슨 상처가 있을까 싶지만, 매일 아침마다 깃발을 올리는 장면은 그녀가 부친을 잃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주인공인 카자마 슌은 뱃일을 하는 아버지를 둔 소년이다. 동아리 건물인 '카르티에라탱'을 지키기 위해 학생회장과 작당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소녀인 우미와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우미의 아버지가, 사실 슌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둘은 이복형제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슌은 갈등하며 우미와 멀어지려 한다. 우미는 그런 슌에게 당돌하게 따져 묻는다. '제가 싫어졌다면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그들의 갈등과 상관없이, 카르티에라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우미가 제안한대로, 카르티에라탱은 대대적인 청소와 보수를 거친다. 그리고 새로운 건물로 재탄생된다. 하지만 학교 측은 건물을 헐기로 결정하고, 이 결정을 취소시키기 위해 이사장을 만나러 학생회장과 슌, 그리고 우미 셋이 움직인다. 그리고 돌아오던 길, 우미는 슌에게 고백한다. '계속 좋아할 거예요!' 슌도 거기에 회답한다. '메르, 나도 네가 좋아.' *

*메르는 프랑스어로 바다. 우미는 海(바다). 우미의 별명이 메르이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침밥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우미가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꽃병에 물을 주는 장면이다. 깃발을 올리자 배에서 소리를 울려 화답해주는 부분이 참 뿌듯하다. 아침식사로 나온 베이컨과 계란은 정말 맛있어 보인다. 낫토에 간장을 붓는 장면마저도 너무 멋진, 아침식사 장면을 볼 때마다 어쩐지 나도 무언가를 하고 싶어진다. 요리든, 청소든. 사실 우미가 매일 무언가를 하기 전, 앞치마를 하는 것이 멋져서 나도 앞치마를 사서 쓰고 있다. 이상한 데서 닮고 싶어하는 기질이 도진 셈이다.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보고서는 키키의 원피스와 비슷한 것을 사겠다고 난리를 쳤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요리 애니메이션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카르티에라탱을 지키기 위한 그 수많은 노력과 청소와 ..... 이런저런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아침밥을 만드는 거라던가 도시락을 싸오는 거라던가 고로케를 먹는 것, 그런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들로 이 애니메이션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처럼 이런 기억을 하는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런 소소한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으니까. 다들, 많이많이 알아주면 좋겠다.


인연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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