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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arlet Feb 27. 2024

[일상 이야기] 버림의 미학, 그 끝에는

버릴 것은 계절을 탄다

유루리 마이의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 는 내게 마치 바이블과 같다. 그 책은 내게 미니멀라이프를 알려주었고, 정리의 가장 쉬운 방향성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유루리 마이는 여름은 더워서 텅 빈 공간을 원하니 버리기 쉬운데, 겨울은 춥고 텅 빈 공간이 썰렁해 보여서인지 계속 뭔가를 모으게 된다고 했다. 언뜻 보면 논리적이다.


반면 나는 겨울에 많은 것을 버리기를 좋아한다. 름 옷은 옷걸이가 부족해서 옷장이 터져 나가기 직전인데도 더 사고 싶고, 겨울 옷은 옷걸이가 절반 이상 비어 있어도 더 비우고 싶다. 이상한 일이다. 매 계절마다 옷을 정리해서 본가에 놓아두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여름 옷이 겨울 옷보다 얇으니 한 박스에 들어가는 옷 양도 많을진데, 어째서 항상 겨울에는 여름 옷 담을 곳이 없어 꾹꾹 눌러눌러 담고 겨울은 대충 던져 담아도 되는 것일까.


사실, 이유가 추측은 가능하다. 나는 보통 겨울에 이사를 했다. 근무지를 옮기는 건 주로 1월 1일 단위였고, 그러다보니 짐을 싸면서 물건을 버리는 은 여름보다 겨울에 흔하게 있었던 일이었다. 의외로 여름은 잔짐이 많고, 쓸 것이 많다. 모기향, 선풍기, 파리채에서 모자와 양산에 이르기까지.


반면 겨울에는 그런 물건이 크게 필요가 없다. 내가 겨울에 쓰는 물건이라고 해야 손수건, 목도리, 장갑이 끝이다. 물론 내복 같은 것도 꺼내야겠지만, 바지형 내복은 레깅스 대용으로 사철 쓰다 보니 계절을 타지 않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나는 가을바람이 선선하여 겨울이 오는구나, 싶은 타이밍에 버리는 것을 일상으로 삼게 되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도 가능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이사는 이삿짐센터가 있는데? 정말로 옳은 말이다. 이 나이가 되어보니, 확실히 돈을 주고서라도 남에게 일임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2년 전의 나는 얼마나 패기가 넘쳤는지, 아무렇지 않게 내 차로 짐을 옮겼다. 말마다 몇 번이고 짐을 옮기곤 했다. 그런데도 3년간 살았던 그 공간이 숨기고 있던 내 물건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제작년에 이사를 하다 반쯤 기절할 뻔 했다. 그 전까지 나는 나 지신을 미니멀리스트라고 생각했다. 집에 물건이 별로 없어 보였다. 이사를 끝내고서야 나는 나 자신을 맥시멀리스트로 재정의할 수 있었다. 없긴 뭐가 없어, 다 숨어 있어.


그래서 요즘은 버리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다. 이것도, 저것도, 요것도. 과거에 그렇게 애정을 담아 구입했던 것들인데, 지금 다시 와서 바라보니 왜 저걸 샀지 싶은 게 많아서 한숨이 나온다. 내 안의 충동성은 이래서 위험하다. 사 놓고 쓰진 않았지만, 내게 필요하다는 강력한 충동을 일으켜 물건을 사게 만든다. 정작 물건을 사고 나면 그 충동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있다. 그 허무감과 공허함이란....


지금은 겨울이다. 내가 열심히 물건을 비울 타이밍이란 뜻이다. 그 말마따나, 나는 정말 열심히 이것저것 버리고 있다. 본가의 경우 서가에서 책을 두 줄 정도는 비웠다. 창고 어느 구석에 처박힌 상장 케이스들도 파일함에 정리하고 다 버렸다. 1미터가 넘어 한 품에 들지도 못할 상자가 고작 A4화일 하나 사이즈로 바뀌어 돌아왔다. 나는 이런 극단적인 변화를 정말이지 좋아한다. 그런데, 분명 물건을 다 비웠는데 서가에는 다른 것들이 가득 차 있다. 다들 어디에 숨었다 나타나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다만 올 한 해는 여름이건 겨울이건 가리지 않고 버릴 것에만 부지런히 집착하려고 한다. 티가 잘 나진 않지만, 아주 조금씩 본가의 물건도 빼돌려 버리고 있다. 본가의 물건은 어머니의 영역이므로, 맥시멀리스트 어머니께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  어머니는 내 태도에 불만이 좀 많다. 마치 테트리스를 쌓듯이, 물건이 완벽하게 딱딱 놓여 있는데 왜 굳이 버리느냐고. 하지만 내 입장에선 한 번도 쓴 적 없고 앞으로도 쓸 일 없는 물건인데, 대체 먼지만 쌓여가는 그것들이 왜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모녀의 의견은 이렇게 어긋나고, 나는 내 물건을 좀 더 최선을 다해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맥주잔을 잔뜩 버린 뒤, 나는 또 물건을 샀다. 차를 우릴 때 쓰는 티팟이다. 버려 놓고 사네, 싶겠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나는 이제, 내가 실제로 사용할 물건만 살 것이다. 차는 내 일상을 차분하게 해 줄 사랑스러운 도구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써야지! 하는 굳은 다짐을 해 본다.


미니멀리스트는 계절을 탄다. 이 겨울, 나의 욕망이 가득 담긴 내 당근 계정의 온도가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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