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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arlet Apr 16. 2024

[옛날 이야기] 나는 아직까지 베 짜는 여인을 희망한다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베를 짜는.

베를 짠다는 것은 남들에게는 너무 까마득한 이야기일 수도 다. 물론 나 또한 베를 짠 경험은 없고, 하지도 못한다. 다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베를 짜던 큰엄마와 방학을 함께 지냈기에, 그 과정은 생생하게 머릿속에 들어 있다.


삼베의 잎은 대마다. 그래서 삼베는 키우기 전 신고를 해야 하고, 다 자라면 경찰들이 잎은 다 따서 폐기처분한다(고 들었다). 잎 없이 남은 줄기로 베를 짠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아마 그 내용이 나왔던 것 같다. 폭포를 보고 삼베를 말리려 걸어 놓은 것 같다고 했던가. 나는 그 표현을 정확히 알고 있다. 큰엄마 집 빨랫줄에 한가득 널린 삼베를 보았으니까. 녹색 물이 덜 빠진 노란색 줄기들이 빨랫줄에 가득했더랜다. 두어 번 만져도 봤지만, 그냥 미끄덩한 풀줄기 같아서 곧 그만둔 기억이 난다. 큰엄마의 손끝과 손 전체는 마치 바짝 마른 논 마냥 갈라져 있었는데, 그것이 삼베 줄기의 독성 때문이라는 것은 좀 늦게 안 사실이다.


내 기억은 중간중간 끊겨 있어서, 정확한 과정은 기억할 수 없다. 순서도 정확하지 않다. 다만 삼베는 공동으로 하는 작업이 있었다. 어른들이 길게 숯 같은 것을 피워 놓고, 그 위에 삼베를 걸쳐 놓고, 솔 같은 것으로 쌈장 같은 것을 바르던 기억이 있다. 대체 저건 뭘까, 하며 고민했지만 아직도 잘 모른다. 다음에 삼베 박물관에 한번 들려서, 내 기억 속 물건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다.


그 다음으론 아주 커다란 정사각형의 네모 틀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 틀이 들어가는 방은 부엌 뿐이었다. 거실도, 큰방도 그 틀은 들어가지 않았다. 큰엄마는 그것을 돌려서 줄을 그 틀 사이로 감았다. 연날리기의 사각 얼레틀을 대략 1.5m장방형으로 늘려 놓은 느낌이다. 그게 뭐에 쓰이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빙글빙글 돌린 기억만이 선명하다. 어린 시절에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것.


그 다음쯤... 일 것이다. 여전히 순서는 모르겠다. 큰엄마는 바구니를 하나 놓고, 아주 길게 실을 만든다. 정종병에 대나무 대를 꽂아 놓고, 대략 1m 정도 베 한 줌을 건다. 걸린 베줄기 한 가닥을 빼서 허벅지 위에 올려 둔다. 허벅지에는 이미 길게길게 늘어뜨린 실이 올라가 있다. 물이나 침을 묻힌 뒤 둘을 도르륵 말면 실은 곧 하나로 단단히 이어졌다. 말로 하니 꽤나 설명이 어렵지만, 눈으로 보면 한없이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주변에 버려진 쭈그레기 실들을 모아서, 큰엄마가 하는 것을 따라 했다. 그 조그만 손으로도 실을 말면 도르륵 말리며 하나가 되는 것이 신기했다. 큰엄마는 나를 위해 실 꽂는 병을 하나 가져다주었고, 나는 그 병에 자랑스럽게 내 실들을 걸어 두었다. 에법 긴 실이 있다 싶으면 큰엄마가 그걸 가져가 본인의 실로 썼다. 나는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큰엄마같은 실 잣기 전문가가 된 것 같았다.


그 뒤의 기억은, 베틀이다. 큰엄마는 베틀로 베를 짰다. 찰가닥 찰가닥 하는 소리가 아주 멋있었다. 베틀은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운 기계였다. 큰엄마가 손을 놀려 북을 옮기고, 발을 눌렀는지 베틀이 크게 찰가닥 하면 한 줄씩 천이 생겼다. 그렇게 찰가닥, 찰가닥 하며 짜인 베가 툭툭 떨어지는 것을 질리지도 않고 구경했다. 몇 번이고 봤지만 대체 어떻게 베가 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큰엄마에게 늘 말하곤 했다. 큰엄마, 내가 크면 베를 짤 거야. 큰엄마처럼 베를 짤 거야. 큰엄마는 그 소리를 들으면 기겁을 했다. 이 아가 먼 소리를 하는 기고? 니는 이런 일을 안 해야제! 하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다. 베틀은 내 거야! 나도 베를 짤 거야!

 

지금 생각해도 베를 짜고 싶다는 생각은 든다. 물론 실을 잣기까지의 그 기나긴 과정을 생각해보면, 어른들이 없는 지금은 베 짜기가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베틀도, 베 짜던 도구도, 그 무엇도 없으니까. 추억으로만 남은 그 기억들이 따스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나만 보면 허허 웃던 큰엄마와 우리 딸내미 어디 갔냐던 큰아빠가 함께해서일 수도 있다. 리고, 내가 동경하고 좋아하던 시의 삶이 그려져서일지도 모른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는 내가 어려서부터 참 좋아했던 시였다. 그 시에 나오는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라는 문장을 나는 몇 번이고 되새기곤 했다. 하늘 가득 담긴 마당과, 초승달을 보며 짖는 삽살개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여전히 나는 베틀에 앉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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