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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arlet May 07. 2024

[일상 이야기] 욕심의 끝을 찾아서

"갖고 싶은 것" 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기

나는 밀크글라스를 좋아한다. 투명한 밀크글라스에 맥심을 타 마시는 맛은 각별하다. 그건 어릴 적, 어른들이 마시던 달콤한 삼단커피의 맛이었을까.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그 시절은 설탕과 프림을 따로 타 마셨으니까. 지금처럼 간편한 맥심 모카골드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래도 그 때의 커피 색은 꽤나 아름다운 갈색이었다. 23호 파운데이션 색깔 같은 그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 큰집에는 밀크글라스가 있었다. 연주황 꽃이 은은히 그려진 찻잔이 아주 예쁘고 귀여웠다. 사이즈가 작아서, 어린 내 손에 쏙 들어갔다. 나는 그 잔을 그 나이때부터 욕심내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도 남의 것을 함부로 욕심내는 건 나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갖고 싶다는 마음을 가득 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땐 이런 잔들을 깨먹기도 쉬우니, 어른들도 딱히 줄 것 같진 않다.


그리고 한동안 삶에 치여 잊고 살았던 밀크글라스의 사랑을 일깨워 준 영화가 있었다. 모두가 알 것이다. '화양연화'  왕가위가 감독했고 장만옥과 양조위가 나온 그 영화다. 제목만큼은 많은 이들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는 어쩌다 보니 그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남들이 스토리나 로맨스 라인, 은근한 사랑 표현과 왕가위의 영상미를 이야기할 때 나는 당당하게 이렇게 외쳐 버린 것이다.


"거기에, 양조위랑 장만위가 카페 가잖아요. 거기서 커피 마시는 그 옥색 찻잔 너무 예쁘지 않았어요? 그 때 커피도 삼단커피일거라 갈색인데, 그게 녹색 찻잔에 비치면서 보이는 게 너무 예쁘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게 미국 파이어킹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제인레이라는 찻잔인데, 일반인들이 그 시절 핫하던 중국 스타일로 녹색을 넣어서 밀크글라스로......."


물론 아무도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도 사실 그 장면은 양조위의 담배연기가 은은히 피어오르고, 장만옥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그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그 자체로만 기억한다. 넥타이와 가방을 이야기하던 두 사람의 모습. 하지만 나는 고작 소품 하나라고 할 수도 있는, 그 은은한 빛에 내용물을 살짝 비추는  아름다운 녹색의 잔에 반한 것이다.


파이어킹 제디트 제인레이. 파이어킹은 미국 회사였고 현재 문을 닫았으므로, 지금 살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중고 앤티크다. 녹색의 은은하게 아름다운 색을 바라보며 나는 다짐했다. 저 세트를 꼭 사야지! 그리고 여러 중고사이트에서 거래되는 제인레이의 금액을 보며 빠르게 마음을 접었다. 음, 전자렌지 안 돌아간대! 이럴 때일수록 신포도 전략을 써야 한다.


아무튼, 그런 슬픈 기억을 남기고 추석에 큰집을 갔더니, 떡하니 있는 그 귀여운 밀크글라스. 그래서 나는 이제, 성인으로서 당당하게 큰집 사람들에게 졸라댔다. 저거 나 줘요. 나 가질래. 큰엄마는 애가 뭘 잘못 먹었나, 하시면서도 두 개를 챙겨 주셨다. 이사를 하면서 나머지는 다 버렸다고 하니, 내 손 안에 남은 두 세트가 최후의 아이들이 되었다. 이런 감읍할 데가! 참고로 찻잔은 소서가 없었기에, 같은 디자인의 접시를 두 개 챙겨와서 소서처럼 써먹을 생각을 했다.


그리고 느낀 점이 있다. 나는 이게.... "갖고" 싶었던 거다. 사랑은 가질 수 없을 때 더 아름답다고 누가 그랬던가. 내 사랑도 그랬다. 내 손 안에 들어온 찻잔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집에선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내게, 항상 500ml 이상의 대용량으로 차를 우려먹는 내게, 이 조그마한 찻잔은 그저 장식일 뿐이었다. 이제는 그 손잡이에 손가락조차 들어가지 않는.


미니멀 라이프란 내가 강하게 갖고 싶고, 사랑하는 대상을 잘 선별하여 사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 '욕망'과 '사랑'의 경계를 알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생각만이 가득하다. 나는 소유를 욕망하는가, 대상을 사랑하는가? 어쩌면 저 두 단어는 비슷할 지 모른다. 아마 사랑스러운 밀크글라스 잔들을 나는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집이 없어, 여기저기를 전전해야 하는 내 상황만을 제외한다면.


 그리하여 나는 찻잔 세트(?) 하나를 지인분께 보냈다. 남은 한 세트는 고민중이다. 여전히 밀크글라스는 아름답고, 50년이 넘게 살아있는 이 아이들은 내게 즐거움을 준다. 그저 아쉽고 아쉬운 것은, 내가 가진 공간이 내 사랑을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충분치 않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과한 욕심을 내버리기로 한다.

 

"갖고 싶은 것" 은 현재 나의 처지를 생각지 않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나의 모든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사야할 것을 뜻한다. 현재의 내가 모아둘 수 있는 것은, 악세사리와 같이 무게가 나가지 않으면서도 막 다뤄도 괜찮은 것들 뿐인 것이다.


내가 내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과연 비우고 싶은지 채우고 싶은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채움은 언제나 '구매'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구입'그 자체에 욕망할 뿐, '구매한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비움을 좋아하는 것일까?

 

여전히 나는 그 판단을 유보한다. 이 주제로 나는  평생 고민을 이어갈지도 모르겠다. 밀크글라스처럼 내 마음이 투명하여, 안이 좀 비치면 좋겠다. 나 자신을 알아가기 너무 어려운 어느 날, 겨울은 그래도 떠나가고 봄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한다.

 

과연 내 사랑과 욕심의 끝은, 어디를 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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