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이야기] 한강, 희랍어 사전

그녀의 사유는 깊고 넓어서 사실 이해하기 힘들어요

by Scarlet

한강의 책은 내가 읽기에 난이도가 너무 높았던 것일까. 책을 필치고서 든 느낌은 그거였다. 사실 맨 처음 손에 잡은 책은 '소년이 온다'였는데,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눈물을 참지 못해 덮어야만 했다. 그런 내가 두 번째로 시도한 책이 바로 희랍어 사전이다. 이 책은 적어도, 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플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나의 얄팍한 마음을 비웃듯이, 이 책은 얇고도 두꺼웠다. 그 느낌을 여기에 간단히 적어볼까 한다. 글로 적고 나면 조금이나마 더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한 여성이 있다. 언어를 잃어버린 여성이 있다. 사실 가족도 잃었고, 아이도 잃은 그녀에게 지금 남은 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는 굉장히 섬세하고 가느다란 사람이다. 마치 말라붙은 고목에 겨우 달라붙어 있는 잎사귀처럼, 그렇게 바람에 흔들리고 채이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그런 느낌이 든다. 그녀는 언어를 잃었다. '그것이 왔다' 고 표현하지만, 그것이 온 것인지 혹은 언어가 떠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그녀는 언어를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언어를 다시 찾기 위해 희랍어를 공부중이라는 것 뿐이다. 아주 과거, 이 상황에서 언어를 돌려준 것이 낯선 프랑스어였던 것을 기억해내고.


한 남성이 있다. 시야를 잃어가는 남성이 있다. 가족은 아주 멀리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그 만큼 멀어져 있다. 이 남자는 세계를 사랑한다. 살아가는 생의 감촉을 사랑하며, 사유를 사랑한다. 이 남자는 마치 갓 틔어난 새싹 같은 느낌으로 살아간다. 마치 갓 태어난 세상에 감사하기라도 하듯이. 그의 편지는 경건한 생의 쉼표 같은 느낌이 든다. 한없이 다정하고 한없이 우아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그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을 세게에 대한 희미한 공포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그 공포는 뚜렷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상을 이해하는 다정한 시야에 그 자리를 뺏기기 일쑤이다.

두 사람은 강사와 강생으로 만난 사이다. 말 없는 수강생은 열정적인 강사와 크게 접점이 없다. 가벼운 트러블이 있었지만, 그것 뿐이다. 강사는 사과했고, 그녀는 여전히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끝날 것이었을 관계는, 아슬아슬히 지속되다가 안경을 잃어버린 강사를 도와주며 가속화된다. 그녀는 말을 잃었지만, 행동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강사가 보여준 사소한 다정 - 수화로 사과하기- 은 그녀의 행동이 보여주는 다정 - 손바닥에 글씨 쓰기 - 로 치환된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러하다.


두 사람은 각각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 것을가지고 있다. 그녀는 언어를 잃어버렸고, 그는 곧 시야를 잃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약 언어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어떤 행동이 누구에게 어떻게 표현될까? 끝없는 질문이 빙빙 맴돈다. 그녀의 삶이 언어를 잃어버린 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언어가 지나치게 타인의 공간을 간섭하지 않도록 조심하던 그녀는, 결국 타인의 공간을 간섭하는 그 통로를 차단하고 말았던 것일까.

보이지 않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죽어버린 희랍어를 공부하는 그, 어쩌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결로 살아가는 남자. 의 공간을 차지하는 데 공포를 느껴, 그 언어가 차지하는 공간마저 지워버린 여성. 두 사람의 관계는 극적으로 배치되는데,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분명 서로를 도와줄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이 너무 짧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강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속에 생긴 거대한 공동을 이해해줄 수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책을 고른 건 아닐까 싶어 꽤 많이 한숨지었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 술술 나오는 게 신기하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나보다. 그와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그 거대한 공동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거대한 결핍을 이해하지 못해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세상을 작가의 눈으로 다시 본다는 건 굉장하다. 나의 삶이 훨씬 다양한 두께의 디테일로 이루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를 깨닫게 해 주는 책이었다. 한강 작가의 책을 읽자고 제안해준 내 친구에게 감사한다.


나의 생은, 어느 언어로 풀어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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